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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5.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江右地域은 아득한 三韓시대부터 전국의 학문적 문화적 중심지가 되어 본 적 은 없었다. 高麗中期 이후 晋州를 본관으로 한 姜氏 河氏 鄭氏의 문중에서 걸출 한 인물들이 많이 배출되었으나, 이들은 현달한 이후로 주로 중앙으로 이주하 였기 때문에 후대의 영향이 크게 없었다. 江右地域의 학문이 본격적으로 흥기한 것은, 佔畢齋가 咸陽郡守로 부임하여 비교적 장기적으로 재직하면서 적극적으로 인재를 양성함으로 인해서이다. 점 필재는 經學과 文章을 융합하는 학문으로 교육하여 그의 제자들은 문학과 경학 에 모두 우수하여 내용 있는 시문을 창작하여 당시 사람들로부터 주목을 받았다. 또 그들은 과거를 통해서 중앙관계에서도 嶺南士林派를 형성하여, 朝鮮 건국 이후 확고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勳舊派를 견제하는 위치에까지 이르렀다. 왕조교체기에 節義를 지키지 않았고, 경학적 뿌리가 없는 詞章 일변도의 시문 을 짓는 훈구파에 대해서 이들은 우월의식을 갖고서 배타적으로 처신하는 경향 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점은 훈구파에게 빌미를 제공하여 戊午士禍에 일 망타진되는 비극을 당하게 되었다. 점필재에 의해서 형성된 朝鮮 前期의 嶺南士林派가 戊午士禍와 甲子士禍로 인하여 그 學脈이 후세에 직접적으로 계승되지는 못했지만, 그 한 세대 뒤에 南 冥 같은 대학자가 崛起하는 데 토양을 제공했을 것이다. 그리고 전기 嶺南士林 派에 의해서 형성된 선비정신은 남명이나 그 제자들에 의해서 더욱 정제될 수 있었을 것이다.
        2.
        2003.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訥庵 朴旨瑞(1754-1819)는, 朝鮮 英·正祖 때 慶尙右道에서 활약했던 학자로 일생 동안 벼슬에 나가지 않고 學問硏究와 弟子養成에 전념했다. 특히 그는 南冥學을 家學으로 하는 泰安朴氏 家門에서 태어나 6대조 凌虛 朴敏과 曾祖父 朴泰茂의 정신을 이어 江右地域에서 비중 있는 역할을 하는 학자로서 여러 가지 큰 儒林事業을 해내었던 것이다. 訥庵은, 近畿南人의 대표적인 학자인 順菴 安鼎福과 退溪學派의 대표적인 학자인 東巖 柳長源을 스승으로 삼아 근기남인과 江左地域의 학자들과 폭넓은 學問的 교류를 하면서, 慶尙右道의 學問的 位相을 높이려고 노력한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南冥의 文廟從祀를 청원하는 疏章을 저술한 남명학파의 핵심적인 인물이다. 남명학파에 속하는 학자로서는 文集의 분량도 상당히 많은 편이고, 그의 문집은 南冥學派 및 江右地域의 學問的 動向을 알 수 있는 文獻的 價値가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당시 學者들로부터 '江右儒宗', 또는 '南州第一人'이라는 稱道를 받았다. 本考에서는, 訥庵 朴旨瑞의 生涯와 그의 폭넓은 師友關係, 당시 江右儒林社會에서의 역할 및 江右學派 연구의 寶庫라 할 수 있는 그의 문집인 『訥庵集』의 내용 및 가치에 대해서 고찰하였다. 訥庵은 江左地域의 많은 學者들과 近畿南人學派의 학자들과 폭넓게 交遊하여 학문적 視覺을 넓혀 江右地域 학자로서의 한계를 초월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의 문집의 분량도 江右地域의 앞 시대 학자들보다 증가할 수 있었다. 江右地域의 先輩學者들의 著述이 거의 없었고, 學統이 이어지지 않았기에, 訥庵이 계승할 수가 없어 정신적으로는 南冥을 이었지만 그 學問形成은 朱子와 退溪의 學問에서 得力하고 있다. 그가 수행한 뚜렷한 業績으로는 南冥의 陞 運動을 비롯한 여러 先賢들의 宣揚事業과 原稿 상태로 남아 있던 이 지역 이전 學者들의 文集의 교정·간행과 매몰된 先賢들의 事蹟을 정리하여 碑碣을 세우는 일이었다. 그의 이러한 왕성한 學問的 交遊와 活動은, 仁祖反正 이후 침체되었던 江右學派가 새롭게 일어날 기초를 마련하여, 19세기부터 江右地域에 많은 학자들이 배출되게 만든 原動力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3.
        2001.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The culmination of the culture in the Josun Dynasty was reached in the academic achievement of Sik Jo (pen name, Nammyung : 1501 - 1572). His work marked a moral boundary in academia at that time. When we consider his great fame, it was natural many scholars and his followers make him their scholastic and behavioral model. These followers formed the Nammyung School and they took active parts in politics in and out of government service until King Sunjo and Gwanghaegoon. But the execution of Inhong Jung (pen name, Rae-Am : 1536-1623), leader of the Nammyung School and mentor of Gwanghaegoon, served as a momentum for decentralizing the school at the time of The Enthronement of King Injo subsequent to dethronement of King Gwanghasgoon in 1623. Hongdo Ha (pen name, Gyumjae) then acted on behalf of the school when the school had lost its cohesion. The year 1728 witnessed the Moosin Year Disturbance led by Heeryang Jung, which was one of the loud cries raised by confucian scholars to regain the positions they had held before the Enthronement of King Injo. Moreover the Noron Party. the group of followers of Siyul Soug and also the party in power, forced the Namin Party, another party in this area, to support it, while it prohibited the Namins from taking any state examinations by law after the Moosin Year Disturbance had been subdued. The Noron Party designed to attract the Namin Party to their side by disturbing its cooperation with the Soron Party, the followers of Jung Yoon, a disciple of Siyul Song's. With the Noron Party's intricately planned policies and efforts, most pepole in the Namin Party in this area became part of the Toegye School in the end. This paved the way for combining the right side and the left side of the Nakdong River as a natural result. There were few eminent scholars or government officials in high positions from the right side of the Nakdong River. In the meantime many scholars had come to stand by either the Noron Party or the Toegye Schoo. But the majority of Confucian scholars' respect for Nammyung had not faded away and his books were still being published. King Jungjo finally granted Nammyung a Royal Oration for the Sacrificial Rite in 1796 and conferred government positions on his descendants after over a century of persecution. The royal edict triggered the revival of the scholastic trend in this area and built a promising foundation for thriving academic achievement in the 19th ecntu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