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고는 최숙민의 ‘명리지학’으로서의 心論을 究明하면서 19세기 후반 20세기 초반까지 지속되었던 성리학적 담론의 일면과 당시 성리학자들의 학문적 공감 대를 시론적으로 고찰한 것이다. 최숙민은 조성가와 정재규와 함께 진주를 중심으로 한 경상우도 지역에 노사 학파의 학문을 확대했던 대표적 인물이다. 노론의 色目을 가지고 있었던 조성 가나 정재규와는 달리, 그는 남인의 색목을 가지고 있으면서 기정진의 문하에 들어갔다. 이것은 정치적 관계에 구애되지 않고 자유롭게 학문적 교유를 전개 하였다는 것을 짐작하게 해 준다. 기정진의 직전제자이면서도 화서학파, 한주 학파, 안동의 퇴계문인 등과도 학문적 교유를 확대하였다. 그의 이러한 학문적 교유에는 당대 지식인들의 학문적 공감대가 형성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고 보인다. 특히 ‘明理之學’을 성현들의 학문이라고 전제 하면서 ‘心卽理’라는 心論을 형성하고 있는 최숙민의 학문은 노사학파의 입장 에서 보면 독특한 일면이다. 그러나 心을 중심으로 한 학문적 경향성은 그의 학 문뿐만 아니라 한주학파, 화서학파 등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최숙민의 心論은 기정진이 부정했던 ‘心卽理’를 오히려 긍정하였다는 측면에 학문적 특징이 있지만, 이것은 理의 氣에 대한 현실적 우위성을 확보하여 理主 氣僕의 가치론적 상하관계를 공고히 하고자 한 것이다. 따라서 理의 절대적 우 위성을 확보하고자 理一元化 경향을 보이는 기정진의 학문을 현실적 측면으로 까지 확대·강화한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현실에서의 理의 우위성을 확보하 고자 했던 학문적 노력들은 최숙민뿐만 아니라 그가 교유하였던 학파들이 공유 하였던 성리학적 문제의식이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變亂의 늪에 빠진 조선을 구하고자 했던 성리학자들의 현실적 고뇌가 담겨 있다.
溪南 崔琡民(1837-1904)은 기정진의 제자이자, 다양하게 전개되어 온 기호 학맥의 끝자락을 장식한 인물이다. 특히 그는 그의 스승 기정진과 함께 율곡학 파에 귀속되긴 하지만, 그의 성리학적 구도는 율곡학이나, 이이의 시각을 수정 없이 그대로 계승한 계열과 많은 차별성을 보여준다. 이 논문의 목적은 최숙민 의 성리학이 어떤 측면에서 율곡학의 관점과 차별성을 보여주고 있는지 그의 리기론과 심성론에 대한 분석을 통해 확인하는 데 있다. 아울러 그러한 차별성 에도 불구하고 그가 왜 여전히 율곡학파의 일원으로 분류될 수 있는지, 그리고 그의 성리학이 조선성리학의 전개사에 있어서 어떤 좌표에 위치해 있는지를 분 석하고 있다. ‘氣發理乘一途’와 ‘심은 곧 기(心卽氣)’라는 명제로 요약될 수 있는 이이의 성리학이 떠안아야만 했던 치명적인 약점은 바로 성리학의 궁극적인 목 표였던 ‘도덕실천의 필연성’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하는 것에 있었다. 그리고 이 렇듯 이이가 남겨둔 문제는 이이의 후계자들이 어떤 형태로든 해결해야 할 과 제이기도 하였고, 율곡학파의 전개사는 곧 이 문제에 고민하며 그 답을 찾아가 는 과정이기도 하다. 최숙민의 성리학에는 율곡학파 300년의 고민이 담겨져 있 다. 그 고민의 결과가 리기론에서는 주리적인 성격의 강화로, 심성론에서는 ‘심 이 곧 리(心卽理)’라는 명제로 나타났다. 물론 이것은 최숙민의 문제해결 방식 이다. 그리고 그의 철학체계는 혹 또 다른 문제를 낳을 수 있겠지만, 최소한 율 곡학파가 고민하던 문제에 대해 그 나름의 해결책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큰 의 의를 가진다.
이 논문은 溪南 崔琡民(1837∼1905)의 삶과 학문경향에 대해 조명한 것이 다. 계남이 활동했던 19세기는 성리학적 통치이념과 가치관이 근원적으로 위협 받고 있었다. 이러한 내우외환의 시대환경을 극복하기 위해 19세기 사상계는 영·호남 할 것 없이 ‘主理’의 학문체계를 통해 이 난국을 타개하고자 하였다. 孔 孟程朱로 내려오는 정통 성리학을 유일한 正學으로 보고 陽明學을 비롯한 西學 등 모든 다른 사상을 이단으로 규정하여 우리 고유의 미풍양속을 지키고 외세 의 침략에 대항하고자 하였다. 계남 최숙민은 선대로부터 내려오는 학문과 절조의 家學的 전통을 이어받아 한평생 학자적 삶을 추구하였다. 젊은 시절 형인 橘下 崔植民(1831~1891)의 보살핌에 의한 獨學, 그리고 중년에 蘆沙 奇正鎭(1798∼1879)의 학문적 기반 을 토대로 하여 만년에 華西學脈 학자들과의 교유를 통해 자신의 학문세계를 열어나갔다. 그것은 다름 아닌 19세기 시대현실에서 노사의 ‘주리’의 학문종지 를 터득하여 후학들에게 열어주는 것을 자신의 일대 사업으로 여겼던 것이다. 그런 가운데 계남은 아버지의 가르침에 힘입어 黨議에 사로잡힌 당시 사상계 에서 학문적 울타리를 트고, 오직 진리를 찾으려는 求道의 일념과 개방적 학문 자세를 견지하였다. 그래서 지역과 당색을 초월하여 많은 학자들과 학문적 담 론을 통해 이론성리학을 지양하고 心學을 위주로 하는 실천성리학을 추구하였 다. 이는 평소 그가 주장한 현실의 삶 속에서 人事인 下學의 실천을 중시하는 학문경향에 기인한 결과이다. 하학의 실천을 중시하는 학문경향은 스승인 노사 기정진의 영향에 힘입는 바 이지만, 아울러 이 지역의 학풍을 주도했던 南冥 曺植(1501∼1572)이 강조했 던 학문관점이기도 하였다. 남명의 학문정신이 19세기에 되살아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실천을 중시하는 下學重視의 학문경향은 바로 계남 학문경향의 주요한 관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