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검색조건
좁혀보기
검색필터
결과 내 재검색

간행물

    분야

      발행연도

      -

        검색결과 2

        1.
        2018.09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논문에서는 출사하지 않고 인격 수양과 학문 탐구에 힘을 쏟으며 일평생을 보냈던 ‘獨善其身’형 인물에 대하여 그 삶의 지향과 가치관 및 처세관의 일단을 파악해 보고자 하는 시도로써, 조선 중기 광해조와 인조반정 등의 급변하는 정세 속에서 일평생 처사로써의 삶의 견지하였던 權是中이란 인물에 주목을 하여 살펴보았다. 권시중은 머물던 곳 근처에 작은 정자를 짓고는 퇴계의 「櫟遷」 시를 걸어놓고 櫟亭居士라고 자호함으로써, 퇴계에 대한 경앙의 심정과 사숙의 마음을 깃들였다. 그리고 아울러 세상에 특출난 재능과 능력을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천성을 온전히 지키는 삶을 살겠다는 의지를 늑정이라는 호를 통하여 드러내었다. 또한 ‘野舟子’라는 호를 통하여 급변하는 세상을 살아나가는 처세의 가치이자 이정표로써 자연을 벗 삼아 여유롭게 소요하는 삶, 외부의 잣대나 평가로부터 벗어난 주체적인 삶을 살고자 하는 의지를 표명하였다. 권시중이 인생의 목표로 지향하였던 이러한 삶의 구호들이 가치를 가지는 이유는 그것이 단지 추상적인 논의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그의 삶에 있어서 중요한 지침이자 실제적 원칙으로 적용되었다는 데 있다. 또한 권시중은 地方誌인 『宣城邑誌』, 지역의 科試 합격자를 기록한 책 인 『善谷蓮桂錄』등을 편찬함으로써 지역 사회에 저술로 공헌하는 실천적 지식인의 면모를 보였다는 점에서도 그 의미를 찾을 수 있겠다.
        2.
        2004.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15-16세기에 걸쳐 계속된 몇 차례의 사화로 많은 지식인들은 은거의 길을 선택 하였다. 이들은 물러나 있지만 현실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을 기울였고, 사회의 부조리에 대해서는 서슴없이 비판하였다. 그들은 ‘隱進’ · ‘處士’ · ‘逸士’ · ‘徵士’ · ‘居士’ 등의 영예로운 호칭으로 불리었으며, 국가에서는 遺逸薦擧制라는 독특한 천거 방식을 통해 그들을 예우하였다. 동주 성제원(1 506-1559) 또한 기묘사화의 참혹한 피해 상을 직접 보고 은거하였다가 후에 遺逸로 천거되었던 인물이다. 그는 당시 退處型사림들의 보편적 학문 성향, 곧 이론적이고 성리학 일변도의 학문 추구보다는 실천적이고 현실적이며, 어디까지나 성리학에 근본을 두되 성리학 외의 불교 · 노장은 물론 천문 · 복서 · 의 학에 이르는 잡학까지 두루 섭렵하는 탄력적인 학문성향을 나타내였다. 士의 출처 에 대해서는 그 시대가 왕도를 실행할 만한가, 士자신이 그 소임을 감당할 충분 한 능력과 자질을 갖추고 있는가 하는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될 때라야만 출사가 가능하다고 강조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평생 출사하지 않다가 말년에 遺逸薦擧로 보은현감에 제수되었는데, 이를 그 동안 자신이 축적한 능력을 발휘할 계기로 삼았다. 이는 3년 간의 치세를 마치자 곧바로 은거의 삶으로 돌아간 그의 결단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동주를 비롯한 이 시기 遺逸之士들의 이 같은 처세는 후세 여러 학자들에 의해 칭송을 받았으며, 출처의 자세와 방향에 準據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