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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晩醒 朴致馥은 유교사상을 바탕으로 한 중국적 세계질서가 붕괴되는 시기에 영남 강우의 유학을 다시 일으킨 대표적 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는 정 재 류치명을 사사하여 전통적인 퇴계학파에 속하면서도 남명 조식의 학문과 사 상을 수용하였으며, 유학을 현실의 맥락에서 재해석하고자 했던 성재 허전의 학문에도 심취했다. 만성은 당시 국가가 당면한 총체적 위기는 유교적 교훈을 따르지 않았던 데에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고 보았으며, ‘진정한’ 유교적 정치사회질서를 회복하는 것만이 국가가 처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올바른 처방으로 보았다. 구체적으로는 ‘華夷論’을 수용하여 오랑캐인 서구세력의 침입으로부터 조선 을 보호해야 하며, 조선은 ‘中華’로 상징되는 유교적 가치와 질서의 옹호자여야 했다. ‘斥邪論’은 당시 집권층과 학파적 바탕을 같이하는 기호지역 유학자들의 지론이었는데, 만성을 통하여 영남의 유학자 가운데서도 이에 적극적으로 공감 하는 사람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만성은 비록 조선후기 일반의 유학자들이 갖 는 세계인식의 한계를 공유하고 있지만, 역설적으로 그의 눈을 통하여 당시 조 선지성들의 사유세계와 그들이 안고 있던 위기의 본질을 엿볼 수 있게 한다.
        2.
        2003.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고는 이황과 조식의 문도들에 의하여 그 학문이 계승 발전되면서 한국적 성리 철학의 틀이 잡혀가고 있던 17세기로부터 성리학이 그 역사적 기능을 종료하던 19세기까지에 걸쳐 강우지역에 나타난 유학의 흐름과 쟁점에 대한 간략한 정리이다. 17세기 초반 강우학파는 鄭仁弘을 중심으로 정치적·학문적 극성기를 누렸으나, 정인홍이 조선성리학의 정통으로 간주된 이황을 비판하고 패륜적 정치사건에 휘말린 일을 계기로 하여 급격히 몰락하게 되었다. 그 후 거의 한 세기에 걸친 시기 동안 강우 유학은 그 餘震의 치유에 매달려야 했으며, 심각한 학문적 침체기를 맞게 된다.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동안 강우지역은 학계의 소외지역으로 남아 있었으며, 몇몇의 학자들에 의하여 간신히 명맥이 유지되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퇴계학과 畿湖의 주기학이 강우를 점령하고, 당파적으로는 남인과 서인이 됨으로써 강우가 본래 가지고 있던 학문적·정치적 정체성을 상실하게 되었다. 긴 어두움이 지나고 19세기에 이르자 강우 유학은 다시 크게 떨치고 일어나는데, 그 주력은 退溪學과 호남의 蘆沙學의 영향권 하에 있었다. 그 특징은 理를 중시하는 학풍이 다른 어떤 곳보다 강했다는 것이며, 이는 성리학적 신념을 고수하는 유학자들이 서세동점의 시기에 대응하는 가장 완고하면서도 근본주의적인 방법이었다. 이를 통해 절의론의 신념을 강화한 강우의 유학자들은 비록 시대의 변화에 탄력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한계는 있지만, 보수적인 유학자들이 행할 수 있는 가장 적극적인 방법으로 국권상실의 시대에 자기에게 맡겨진 임무를 수행해 갈 수 있었다. 그것은 유학의 기능이 종언을 고하는 시대를 화려하게 장식하는 불꽃과 같은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