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계서원을 비롯한 대부분의 서원은 지역의 고등 교육기관, 출판사 및 도서관이라는 직접적으로 교육과 관련된 역할 외에, 수많은 부작용 을 불러일으킨 향촌 유림의 지역운영 혹은 지배 기관으로 작용하였고, 중앙 정계와 연결고리를 형성하며 학파와 정파 활동의 지역 거점 역할까 지 수행하였다. 특히 학파와 정파 활동의 지역 거점 역할이라는 측면에 서 남계서원의 경우, 건립과정이나 건립초기에는 남명학파나 북인정권 의 영향아래에 있었지만, 인조반정이후에는 남인계 서원으로, 戊申亂과 갑술환국이후에는 다시 노론계 서원으로 그 성격이 변화했다. 이러한 사실에서 보자면 남계서원이 어떻게 자신의 정체성을 변화시켜갔는지, 그리고 왜 남계서원이 그렇게 변화해 갈 수밖에 없었는지는 남계서원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간과할 수 없는 주요한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점에서 이 글은 남계서원의 성격변화와 그 과정을 살펴보고, 남계 서원에 주향되고 있는 정여창의 위상은 그와 같은 서원의 변화 속에서 어떻게 자리 잡고 있는지 확인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논의는 먼저 서원을 세운 인물들을 중심으로 창건 당시 남계서원의 성격을 살펴본 후, 이것을 이어 후대로 내려가면서 남인계 서원과 노론계 서원으로 그 성격이 변해가는 모습을 구체적으로 확인해 보고, 마지막 결론에서 김굉필과의 비교에서 정여창의 위상을 살펴보고 있다. 김굉필의 경우 그의 진외증손인 정구에 의해 천곡서원과 도동서원 등에서 정이와 주희를 직계승한 인물로 추존되는 모습과 함께, 고향인 현풍과 성주ᆞ고령 등의 낙동강 중류 지역에서 상당한 위상을 가질 수 있었다. 반면에 정여창은 남명학파의 몰락 이후, 뚜렷한 계승자의 부재와 함께 정파와 학파적 기반마저 상실함으로써 더 이상의 위상제 고는 이루어질 수 없었다. 남명학파의 몰락은 남명학의 전승뿐만 아니 라, 남계서원의 성격변화와 정여창의 위상에도 일정한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본고는 一蠹 鄭汝昌(1450-1504)의 삶과 학문적 특징이 무엇이며 그의 생활 및 강학 공간인 지리산권, 그 가운데서도 하동의 악양정과 함양의 남계서원이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가 하는 것을 따진 것이다. 정여창에게 있어 하동과 함양은 대표적인 삶의 공간이었기 때문에 하동은 악양정을, 함양은 남계서원을 중심으로 살폈다. 악양정은 그가 은거하며 심성수양과 강학활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한 곳이라는 측면에서, 남계서원은 정여창 사후 이곳을 중심으로 추모사업이 적극적으로 진행되었다는 측면에서 중요하다.
정여창은 김종직 문하에서 『소학』을 중심으로 한 실천유학을 배워 김굉필과 함께 도학의 선구가 되었다. 하동의 악양정은 중요한 문화공간으로 거듭났는데 李澄이 그린 「花開縣舊莊圖」나 한말 정재규의 「岳陽亭會遊記」등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함양의 남계서원은 북인, 남인, 노론의 장악이라는 정치적 변화과정을 거치기는 하지만, 그 중심에는 정여창의 정신을 계승하려는 노력이 굳건히 유지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정여창을 추모하기 위한 노력과 함께 수많은 시문이 창작되기도 했다.
경상도 함양에 있는 鄭汝昌을 모시는 남계서원은 명종대에 건립되고 대원군 의 서원 철폐에도 남게 된 영남우도의 대표적인 서원이다. 명종 7년에 姜翼 등 함양 사림 몇몇이 함양군수의 협조를 얻어 건립하기 시작 하였다. 고을 사림들의 반대, 흉년, 후임 수령들의 무관심 등으로 공사가 중단되 었으나 주변 고을 사림들의 도움, 함양과 연고가 있는 지방관들의 후원, 처음과 는 다른 함양 사림들의 협력을 얻어 10년만인 명종 16년에 강당과 묘우를 완성 하였다. 서원의 설립과 운영에 사림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는 서 원이 새로운 향촌기구로 지방 사림들에게 주목을 받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남계서원은 정기적인 제례를 거행해 나갔고, 교육활동을 전개하였으며, 기증, 구입, 內賜 등의 방법으로 많은 서적을 소장하였다. 그리고 춘추로 講信禮를 거 행하고, 서당과 연결하여 교육하는 등 향촌의 교육과 교화에 깊게 간여하여 고 을의 중심기구로 자리잡아가고 있었다. 남계서원이 조식의 학문적 영향권에 속해 있어, 北人 관료들의 성장에 어느 정도 기여했음을 예상해 볼 수 있다. 그런데 서원과 관련 있는 사림들의 科擧와 官歷을 조사해보면 관직 경험자는 미미할 정도였다. 사림파들에게 재기의 터전 이 되고, 중앙정계를 지배하게 된 기반이 된 것이 서원이었다는 개설서와 교과 서 등에서의 설명에 의심이 가게 만들고 있다. 남계서원이 정유재란으로 불타버리자 인근의 新溪書院과 함께 묶어 재건을 추진하였다. 신계서원의 盧禛과 강익의 위차 변경을 둘러싸고 함양 사림들이 갈등과 분열의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위차의 다툼이 서인과 북인의 대 립으로까지 비화되는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결국 신계서원이 예전처럼 독립해 나가고, 남계서원은 옛날 위치로 다시 돌아와 재건되었다. 북인계 성향을 보이던 남계서원은 인조반정 이후 자구책으로 남인계 서원으 로 바뀌어 갔다. 별묘를 세워 강익, 鄭蘊, 兪好仁을 모셨다가, 숙종대 남인정권 에 힘입어 강익과 정온의 위패를 남계서원의 배향으로 올렸다. 하동 정씨들이 이인좌란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운 이후, 남계서원은 경원장 제 도를 채택하는 등 노론계 서원으로 기울어져갔다. 19세기에는 정여창 후손들이 별유사를 맡아 서원의 재정 운영과 건물 수리에 깊게 간여하고, 함양유림들과 협의 없이 묘정비를 세워 분란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남계서원이 점차 문중서 원화되어 가는 가운데, 문묘에 모셔져 있는 정여창의 사액서원이라 하여 대원 군이 단행한 서원 철폐를 모면하고 존속할 수 있었다. 남계서원을 통하여 조선시대 서원은 양반 사림들의 교육기관으로, 당쟁의 여 론 기구로, 서원 후손들의 문중 기구로 성격이 변모되어 왔다고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