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는 문자를 매개로 하여 자신의 성정을 나타내는 특수한 예술이다. 논서시는 내용 전달에서 서예를 주제로 삼아 시의 형식을 빌려 서예를 논한 것을 일컫는다. 이는 서예의 명칭․원류․도리․서예가․서예작 품․서예사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이를 또한 운문 형식의 시로 표현 하였기 때문에 산문형식의 서예이론에 비해 상징적․추상적․은유적 성격이 강하면서도 완곡한 의미를 함유하고 있다. 한국의 논서시는 신라 최치원이 효시를 이룬 뒤 고려 문인들이 한국과 중국의 서예와 관련된 내용들을 다각도로 작시(作詩)하였다. 조선시대의 서예개황은 고려말기 만권당을 통해 송설체가 유입된 이후 조선 초기 송설체의 대가 이용이 나왔고, 중기에 들어와 김구의 인수체(仁壽體)와 성수침의 청송체(聽松體)로 이어졌다가, 마침내 한호의 석봉체(石峯體)가 완성되었다. 조선시대의 논서시에서 초기를 대표하는 이용은 필법․자태․근골․정신이 뛰어났다. 그러나 송설체는 말류의 폐단을 나타내자, 성리학자들은 논서시를 통해 이를 걱정하며, 서예의 근본을 추구하는 경향을 나타내었다. 중기에서 자주의식을 갖추고 조선 미감을 대표하는 한호에 대해 송설체를 벗어나, 왕희지를 추구하는 논서시들이 나타났다. 후기의 이광사는 논서시를 통해 왕희지체를 전범으로 삼은 바탕에서, 조선 서예의 토착화를 모색하였다. 말기를 대표하는 김정희의 공허한 성리학보다는, 실사구시의 금석고증학을 기반으로 한 북학을 학문과 예술로 승화시켰다. 이러한 조선시대 논서시의 특징은, 조선 서예사의 반영, 조선인의 예술적 정감을 표현, 시대마다의 서예 비평 등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서예를 논한 운문의 논서시는, 논리의 체계를 갖추고 의미를 전달한다는 면에서, 비록 형식의 서사시로 쓴 서론 보다는 미흡하지만, 표상적이며 최상인 문인서예에 더욱 걸맞은 것이라 하겠다. 연구를 폭 넓게 확대하여 논 서시에 대한 관심을 갖는다면, 문인서예발전에 이바지 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서예 창작에 많은 도움을 주어 서예에 건실한 표석이 될 것이다.
서예는 문자를 매개로 하여 자신의 성정을 나타내는 특수한 예술이다.
따라서 서예는 문자를 떠날 수 없고, 이를 서사하는 것과 내용 전달이라는 두 가지 효능을 갖추고 있다. 내용 전달에서 서예를 주제로 삼아 시의 형식으로 표현한 것을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 시는 절제된 언어, 서예는 문자를 빌려 사상과 정감을 나타낸다. 논서시는 시와 서예의 발생과 형성과정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지금까지 작가의 이름이 기록된 최초의 서론은 최원의 『초서세』이고, 이는 『시경』과 같은 사언시로 썼기 때문에 논서시의 원류로 삼을 수 있다. 시는 한나라의 賦, 위ㆍ진나라의 行, 당나라의 근체시에 이르러 비로소 완전한 체제가 완비 되었다. 논서시의 발생과 형성과정은 이와 맥락을 같이 하였다. 즉 한나라 최원의 『초서세』는 논서시의 발생과 원류, 위ㆍ진나라 조식의 「장가행」은 형성과정의 대표작품, 당나라 논서시는 체제의 완성이라 하겠다.
최원의 『초서세』는 사언시의 형식을 빌려 서예의 기원과 초서의 발생 ㆍ법도ㆍ효능ㆍ심미ㆍ감상 등을 언급한 최초의 논서시이기 때문에 이를 논서시의 발생과 원류로 삼기에 충분하다. 조식의 「장가행」은 당시 유행하였던 行의 시 형식으로 문자의 생성과 서사 재료를 논하였다. 논서시의 체제가 완비된 당나라에서는 서체ㆍ서예가ㆍ서예작품에 대한 것 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이에 대한 연구는 비록 논서시의 발생과 형성과 정이지만, 이를 근원으로 폭 넓게 확대하여서. 연구한다면 문인서예와 나아가 새로운 서예 창작에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