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강 유역에 위치한 진주 대평리, 평거동, 초장동 등 대규모 유적의 분묘 경관을 통해 취락 안팎의 구조와 상호작용에 대해 살펴보았다. 먼저 분묘의 가시 경관과 취락 영역 간의 관계를 추론하였다. 이 는 분묘에서 바라본 시각적 체험 경관은 사회구성원들이 일상에서 인식하고 있었던 영역이며, 취락의 정치적·경제적·이념적 영역과 직접 관련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였다. 가시권분석 결과, 대규모 취락의 가시권은 대체로 반경 5km에 해당하며, 서로 가시권을 공유하지 않는 배타적 경관을 이루고 있었다. 이를 통해 국지적 단위공동체는 각기 독립적인 영역을 유지하며 상호작용하는 등질적인 구조 를 형성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취락 내부의 경관은 분묘군을 중심으로 차별적이고 역동적인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이는 분묘의 군집 유형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Ⅰ유형은 대형 묘역지석묘 주변에 분묘군이 조영된 것으로, 선대 권력을 상징하는 지석묘 주변에 분묘를 환상이나 열상으로 배치하여 전통적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자 하였던 경관 조성 전략이 작용한 결과로 이해된다. 특히 이 분묘군은 취락 안팎에서 상시 체험 가능한 현저한 곳에 축조되어 있어 구성원들의 시선과 움직임을 통제할 수 있는 지배적 경관을 구성하고 있 었다. Ⅱ-1유형은 생활 공간에 분묘를 열상으로 배치하여 이를 매개로 공동체성을 강화하려는 의도 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Ⅱ-2유형은 농경지 경계면에 분묘를 축조하여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 하는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Ⅲ유형은 분묘들의 장축이 상호 교차하는 군집으로, 무덤의 공간 순서 변 경을 통해 사회 질서의 변화를 추구하였던 행위자의 표현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군집 유형은 모든 대규모 취락에서 일률적으로 확인되지 않았다. 취락 내부의 공간적 맥 락을 통해 볼 때, 분묘는 단순히 매장시설이 아니라, 유력자들이 권력 관계를 합리화하거나 재조정하 고 구조화하는 사회적 행위 공간이었다. 이러한 공간 조성은 각 취락의 물리적 환경과 구성원들의 경 관 해석에 영향을 받았으며, 분묘 축조를 주도하였던 주체들의 공간 구현 전략에 따라 각기 다른 형태 로 나타났다. 남강 유역 대규모 취락의 분묘는 각 사회-공간의 상호작용에 의해 형성된 차별적 경관 을 구성하고 있었으며, 권력과 공동체성을 대표하는 의미화된 장소로서 역할을 하고 있었다.
청동기시대 진주 대평리유적 중 옥방 1지구를 10개의 권역으로 구분하여 검토하였다. 충적지에 형성된 유적으로 당시의 생활면이 그대로 잔존하는 곳이다. 옥방 1지구 검토대상구역은 하촌리식주거지 단계, 휴암리식주거지 단계, 송국리식주거지 단계로 구분된다. 휴암리식주거지 단계가 대평리유적의 중심시기이며 세부적으로 세 시기로 구분이 가능하다. 대평리유적의 중심시기는 비파형동검를 패용하고 돌을 이용한 대형묘역지석묘가 축조될 정도의 강력한 지도력이 나타나기 직전이지만 남강 일대 최대의 거점취락이다. 이러한 에너지가 이후 송국리식주거지 단계에 대형 묘역지석묘나 대형굴립주 등이 등장 확산되고 비파형동검을 패용하는 유력개인이 등장하는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대상유구(帶狀遺構)는 구와 노지가 결합된 세트로 파악하여야 하며 내부에서 공동 취사가 이루어진 의례 행위의 장소로 파악하였다. 검토대상구역에는 약 28~32세트가 분포한다. 무덤은 25기가 조사되었는데 검토대상구역에는 약 2그룹으로 분리되어 분포한다. 야외노지는 약 30~40기가 분포하는데 개별 주거의 야외 취사시설로 파악하였다. 가마는 대상유구가 폐기된 이후에 전용된 예도 있으며 직경 2m내외의 수혈을 굴착하여 사용하기도 하였는데 52기가 분포한다. 굴립주는 8기가 분포한다. 동시기에 10동 내외의 주거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5기의 무덤을 축조하고 5세트의 대상유구에서 의례활동을 하였다. 가마는 개별 주거별로 사용하였고 창고로 이용된 굴립주는 3주거당 1기를 이용한 것으로 파악하였다. 송국리문화분포권은 비분포권에 비해 취락에서 개별 가옥의 범위를 벗어난 공동행위가 더 많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