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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8.05 KCI 등재 SCOPUS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Hydrothermal synthesis of highly crystalline TiO2 nanorods is a well-developed technique and the nanorods have been widely used as the template for growth of various core-shell nanorod structures. Magneli/CdS core-shell nanorod structures are fabricated for the photoelectrochemical cell (PEC) electrode to achieve enhanced carrier transport along the metallic magneli phase nanorod template. However, the long and thin TiO2 nanorods may form a high resistance path to the electrons transferred from the CdS layer. TiO2 nanorods synthesized are reduced to magneli phases, TixO2x-1, by heat treatment in a hydrogen environment. Two types of magneli phase nanorods of Ti4O7 and Ti3O5 are synthesized. Structural morphology and X-ray diffraction analyses are carried out. CdS nano-films are deposited on the magneli nanorods for the main light absorption layer to form a photoanode, and the PEC performance is measured under simulated sunlight irradiation and compared with the conventional TiO2/CdS core-shell nanorod electrode. A higher photocurrent is observed from the stand-alone Ti3O5/CdS coreshell nanorod structure in which the nanorods are grown on both sides of the seed lay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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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9.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仁祖反正(1623)으로 쇠퇴하기 시작한 남명학파는 戊申亂(1728) 이후 강우지역 에 대한 경계와 불신이 짙어지면서 더욱 위축되더니, 끝내 과거의 영광을 회복 할 기회도 얻지 못한 채 역사의 뒤안길로 잊혀야 했다. 눌암 박지서가 한창 활 동하던 시기는 18세기 후반~19세기 초반으로, 남명학의 쇠퇴가 150년 이상 지 속되고 나아질 기미조차 없던 시기였다. 눌암은 가계·학문·지역적 연원으로 보아 남명학적 성향이 다분히 드러날 수밖 에 없는 여건이었지만, 정치적으로 배제된 지역의 在地士族으로서 문중을 살리기 위해서는 현실적 대세를 비켜갈 수 없었다. 이에 진주지역에 세거한 눌암의 문중도 증조부 때부터 南人化 성향을 드러냈고, 눌암에 이르러 더욱 폭넓은 교유를 통한 남인화가 이루어졌다. 그에게서 보이는 退溪 중심의 治學 방법이나 문학작품에서 남명학 관련 언급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 점 등이 이러한 문중적 성향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눌암이 강우지역 남명학파적 성향을 버리고 남인으로서의 특성 만 드러낸 것은 아니었다. 가계·학문·지역적 여건에 의해 계승된 남명학파적 성 향 위에 남인화 성향이 보태진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다만 눌암이 평생 이룩한 수많은 지적활동은 강우지역에 집중되어 나타났다. 강우지식인의 오랜 염원 인 南冥의 文廟從祀 請願을 주도하였고, 침체된 진주지역의 鄕學風 쇄신을 위해 향교와 서원 등의 교육시설 중건에 앞장섰으며, 남명학파의 시련과 함께 역사에 묻혀버린 지역 선현의 삶을 찾아 기록으로 남기려는 노력들이 이를 증빙하고 있 다. 적어도 그의 생애에 드러난 활동으로 평가한다면, 눌암은 남명학파적 성향 을 지닌 江右學者였다고 하겠다.
        3.
        2006.0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최근 부산 신항만의 1단계 개발이 북 컨테이너 터미널쪽으로 가시적으로 나타나고, 12,000TEU 대형 컨테이너선을 서비스할 수 있도록 접근 수로 및 박지의 수심을 기존 15m 에서 18m로 준설작업을 통해 증심시킴과 아울러, 신항만의 웅동만 내 일부 수역을 매립하는 것으로 항만배후지 부분의 매립계획에 대한 수정이 논의되고 있다. 더구나 2003년 태풍 매미의 내습 이후 이곳 해역에서 항만구조물 설계의 기준이 되는 입사 파랑의 변화로 인해 각 부두에서의 극한파랑조건 및 항만 내 정온도에도 다소의 변화가 발생할 것으로 예상되어 각 부두에서의 정온도 분석이 뒤따라야 한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이들 변화에 대한 수치모델을 구성하고 실험을 수행한 후 현장 계측 자료와 함께 실험결과를 비교하였으며, 아울러 유동장에 대해서도 검토하였다. 결과, 전반적으로 항만의 반응이 증가되는 편이나 우려할 수준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일부 구간에서는 태풍내습 시 대비하여야 하는 경우도 발생하였다.
        4.
        2003.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訥庵 朴旨瑞(1754-1819)는, 朝鮮 英·正祖 때 慶尙右道에서 활약했던 학자로 일생 동안 벼슬에 나가지 않고 學問硏究와 弟子養成에 전념했다. 특히 그는 南冥學을 家學으로 하는 泰安朴氏 家門에서 태어나 6대조 凌虛 朴敏과 曾祖父 朴泰茂의 정신을 이어 江右地域에서 비중 있는 역할을 하는 학자로서 여러 가지 큰 儒林事業을 해내었던 것이다. 訥庵은, 近畿南人의 대표적인 학자인 順菴 安鼎福과 退溪學派의 대표적인 학자인 東巖 柳長源을 스승으로 삼아 근기남인과 江左地域의 학자들과 폭넓은 學問的 교류를 하면서, 慶尙右道의 學問的 位相을 높이려고 노력한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南冥의 文廟從祀를 청원하는 疏章을 저술한 남명학파의 핵심적인 인물이다. 남명학파에 속하는 학자로서는 文集의 분량도 상당히 많은 편이고, 그의 문집은 南冥學派 및 江右地域의 學問的 動向을 알 수 있는 文獻的 價値가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당시 學者들로부터 '江右儒宗', 또는 '南州第一人'이라는 稱道를 받았다. 本考에서는, 訥庵 朴旨瑞의 生涯와 그의 폭넓은 師友關係, 당시 江右儒林社會에서의 역할 및 江右學派 연구의 寶庫라 할 수 있는 그의 문집인 『訥庵集』의 내용 및 가치에 대해서 고찰하였다. 訥庵은 江左地域의 많은 學者들과 近畿南人學派의 학자들과 폭넓게 交遊하여 학문적 視覺을 넓혀 江右地域 학자로서의 한계를 초월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의 문집의 분량도 江右地域의 앞 시대 학자들보다 증가할 수 있었다. 江右地域의 先輩學者들의 著述이 거의 없었고, 學統이 이어지지 않았기에, 訥庵이 계승할 수가 없어 정신적으로는 南冥을 이었지만 그 學問形成은 朱子와 退溪의 學問에서 得力하고 있다. 그가 수행한 뚜렷한 業績으로는 南冥의 陞 運動을 비롯한 여러 先賢들의 宣揚事業과 原稿 상태로 남아 있던 이 지역 이전 學者들의 文集의 교정·간행과 매몰된 先賢들의 事蹟을 정리하여 碑碣을 세우는 일이었다. 그의 이러한 왕성한 學問的 交遊와 活動은, 仁祖反正 이후 침체되었던 江右學派가 새롭게 일어날 기초를 마련하여, 19세기부터 江右地域에 많은 학자들이 배출되게 만든 原動力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