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 안창호 선생이 만드신 애국시가 수십 편에 이른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또 그것이 ‘애국창가’라는 장르의 노래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도 많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그중에는, 한 시대를 풍미하였고 또 음악사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노래가 적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사실을 아는 사람도 별로 없을 것이다. 한국근현대음악사 관련 문헌을 보더라도 안창호 선생이 지으신 애국시(愛國詩)를 가사로 한 애국창가에 관련된 내용은 거의 없다. 심지어는 ‘도산 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의 홈페이지에도 ‘노래’라는 코너는 있지만 가사만 소개되었을 뿐이고, 도산기념관에서조차 노랫소리를 들을 수 없다. 왜 그럴까…? 이유는 간단하다.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국보급 문화유산과도 같은 선생의 노래를 보존은 고사하고 잃어버렸기 때문에 잊혀진 노래가 되어버리고만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일제(日帝)는 선생뿐만 아니라 선생의 노래마저도 철저히 탄압을 하였다. 노래 부르는 것은 물론 금지를 시켰고 악보를 압수하여 불에 태워 버렸다. 때문에 국내에서는 선생의 이름이 들어가 있는 노래를 부를 수가 없었다. 그런 와중에 몇몇 노래는 다른 사람이름으로, 또 몇몇 노래는 만든 사람의 이름이 없는 가운데 불리기는 했지만, 그 노래(가사)를 만든 사람이 도산 선생이라는 사실은 알려지지 않았 다. 다행히 최근 들어 여러 학자들의 노력 덕분으로 도산 선생의 작품 또는 도산 선생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애국시’가 수십 편 발굴이 되었다. 그리고 동시에 그 시(詩)를 가사로 하여 만든 애국창가도 수십 편이나 발굴이 되었다. 그 대표적인 예로써, 1914 년 중국 만주에 설립된 민족학교인 광성중학교에서 발행한 『最 新唱歌集附樂典』과 하와이에서 1916년에 발행한『애국창가』 등을 들 수 있다. 그렇지만 『最新唱歌集附樂典』과 『애국창가』에 수록된 악보는, 거의 100년이 지났고 또 구전(口傳)된 것을 악보화하였기 때문에 가사와 음(音)의 정확성이 다소 떨어지며, 필기체로 흘려 쓴 것이 많고, 띄어쓰기가 없고, 악보 표기가 잘못되었거나 안 보이는 부분이 많은 등 가독성이 떨어지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곡을 만든 작곡자의 이름을 명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가사에 곡을 붙인 오리지널 곡인지, 기존 곡에 가사를 붙인 것인지, 한국 사람이 만든 곡인지, 서양 사람이 만든 곡인지, 일본 사람 만든 곡인지 알 수 없다는 문제점도 가지고 있다. 도산 선생의 애국시를 가사로 한 애국창가를 국민들에게 보급 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일은, 악보를 가독성이 있는 현대 악보로 복원하는 일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악보집으로 만들어 보급한다면, 음악회뿐만 아니라 교육용, 연구용 등 많은 용도로 활용이 될 것이고, 근대 관련 영화나 독립운동 관련 다큐멘터리의 배경음악을 만드는데도 활용이 될 것이다. 본고의 1차적 목적은 악보복원에 있다. 그리고 그 곡의 음악적 특징 및 음악사적 의미를 고찰해 보고자하는 또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다. 마지막으로 그 복원한 악보를 바탕으로 음악회 형식으로 재현해 보고자 한다.
『악학궤범』에 수록된 <봉래의>의 ‘치화평무’는 사방대형에서 북대2인이 북향무·대무·배무를 추고 우선(右旋)하여 자리를 바꾸어서고, 매 대의 춤이 마치면 무 전체가 중행회선하여 좌우대형 으로 서는 춤이다. 창사는 모두 4장으로 구성되었고 춤의 구조도 이에 따라 일률적으로 진행한 다. 그러나 춤의 구체적인 내용을 처음의 북대2인에게만 제시하고 나머지 3대에게는 제시되지 않 았고, 무엇보다 무원의 명칭을 북대2인으로만 기록하여 ‘치화평무’를 추는 무원들의 구체적인 이 동경로를 확인하기 어려웠다. 그래서『세종실록악보』에 기록된 치화평 음악에 추어진 <봉래의>의 치화평의 내용을『악학궤범』을 중심으로 실연관점으로 분석하였을 때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었다. 첫째,『악학궤범』의 정재무도[致和平回舞圖]에서 확인한 북대2인은 좌무1과 좌무2, 좌무3과 좌 무4, 우무4와 우무3, 우무2와 우무1로 구성된 것을 확인하였고, 북대에서의 춤은 좌무 및 우무가 각각 짝이 되어 춘 것이었다. 둘째, 4장으로 구성된 ‘치화평무’의 창사 구조에 따라 매 무원들이 ‘북향무-대무-배무-우선회 무·회무’로 추어져 창사와 춤의 구조가 같은 것을 알 수 있었다. 셋째, 북대에서 북향무를 출 때는 금척무, 우선회무 돌 때는 사수무, 우선회무하여 자리를 바 꾸어 선 다음에는 염수족도, 그리고 대무와 배무 사이에 북향하는 것은 <봉래의> ‘치화평무’를 추 는 무원 8인 전체에게 적용된 것을 알 수 있었다. 넷째, 북대2인의 무원이 구체적으로 드러남으로 해서 우선회무는 좌무1·좌무2, 좌무3·좌무4, 우무4·우무3, 우무2·우무1 순으로 차례로 이동 한 것이었고, 반면 회무는 좌무와 우무 모두 ‘1-2-3-4’순으로 구성되어 우선회무와 회무의 이동 경로가 다른 것을 알 수 있었다.
본 연구에서는 심소(心韶) 김천흥(金千興, 1909∼2007) 선생의 첫 번째 창작무용극《처용랑》의
사료를 분석함으로써 복원 및 재현을 위한 기초자료를 제공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처용랑》에
관련된 사료분석을 시도했으며, 분석대상은 국립예술자료원, 국립국악원, 한국춤문화자료원 등에
분류되어 소장되어 있는 문헌자료, 프로그램, 무보 및 대본, 포스터 및 전단, 신문 및 잡지기사,
영상 및 음악, 의상 및 소품, 사진, 서신 등이며, 구술사료는 국립예술자료원의 채록관과 국악음
반박물관 홈페이지에 탑재되어 있는 김천흥 선생의 구술자료와 현재 중요무형문화재 <학연화대
무> 보유자인 이흥구 선생의 구술자료를 활용했다. 이에 대한 분석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처용랑》은 극적인 줄거리, 춤, 음악, 창사 등 가·무·희 일체의 총체성을 담은 무용극
의 조건을 갖추었다. 춤은 한국의 전통 설화, 궁중정재, 민속무용 등 전통에 근거해 새롭게 창작
되었으며, 음악은 춤의 종류와 무대구성 그리고 춤의 전개에 맞게 창작되었다. 또한 처용의 애타
는 마음을 담은 창사를 읊는 부분이 삽입되었다. 둘째, 무용극의 줄거리는 등장인물의 배역에 따
라 적절하게 표현되었으며, 각 배역은 처용설화의 내용을 극적으로 표현했다. 헌강왕은 망해사를
지어 불공을 드리며 동해 바다에 사는 용왕의 화를 달래고 나라의 태평성대를 표현했다. 용과 용
자들은 기뻐 춤을 추고, 신라에 남은 처용은 역신과 아내의 간통을 용서하며 대인임을 표현했다.
셋째, 배역에 따른 여러 종류의 춤과 무대의 구성을 새롭게 창작했다. 궁중정재 <무애무> 재현을
비롯해 <용의 춤>, <용자의 춤>, <역신의 춤>, <처용처의 춤>, <처용의 춤>을 창작했으며, 불교작
법의 전통적 요소를 무용극에 도입했다. 넷째, 음악은 새롭게 창작되었으며, 30여명의 아악사들이
실제 무용극 공연에서 삼현육각의 대합주로 연주했다. 다섯째, 무대장치와 조명은 사실적으로 꾸
며 무용극의 내용을 효과적으로 전달했다. 여섯째, 의상과 소품은 신라시대의 의복을 근거로 새
롭게 제작했으며, 전통적인 소도구를 사용해 배역의 특징과 무대장면을 효과적으로 연출했다.
결론적으로 이 연구는 김천흥 선생 타계 후 그의 첫 번째 창작무용극《처용랑》의 복원 및 재
현을 위한 사료분석으로서 의미가 있다. 또한 김천흥 선생이 가진 조선의 예악사상과 가·무·희
일체의 총체성을 보여준 것으로서, 그의 춤 경험과 신무용의 붐에서 비롯된 창작현상 및 전통춤
의 대중화를 위한 창작 정신을 보여준 데에 의미가 있다. 이는 전통에 근거 한 창작세계의 면모
와 정보를 제공할 것이며, 미래 한국춤 창작의 한 틀을 만들 수 있는 기초자료가 될 것으로 기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