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구는 10·16 부마민주항쟁의 발생사에 해당하는 부산상대생 시위 의 발생 경과와 동인(動因)을 주로 검토한 것이다. 부마항쟁 발생일로부 터 거의 반세기가 경과했지만 아직까지 10.16의 발생사는 제대로 정리되 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운동권 중심설이 등장하여 심각한 역사 왜곡이 더해지고 있다. 본고는 1979년 10월 16일의 부산상대생의 시위를 온전 하게 복원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연구방법으로는 연구의 객관성을 담 보하기 위해 부산시경 분석자료 등 공적 기록에 근거하여, 역사적 사실 에 부합하는 증언과 구술을 활용하여 부산대학생의 내적인 사회비판의식 의 성장을 해명하는데 초점을 맞추었다. 말하자면 운동권 중심설에 대치 되는 내재적 접근법이라고 명명할 수 있다 내재적 접근법에 따르면 부산 대의 10·16 민주운동에서 상대생 시위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또한 50명의 상대생 시위가 상상을 초월하는 대규모 학생대중투쟁으로 전화했 던 것도 이런 내재적 요인들이 주요하게 작용한 것이었다.
유신체제시기 1979년 10월 16일부터 20일까지 부산과 마산에서 발생한 부마항쟁은 유신체제의 제반 모순에 대한 도전이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6일 뒤 박정희 대통령이 권부 내 갈등으로 살해되는 10·26사건이 일어남으로써 부마항쟁은 이 사건의 도화선 역할을 한 ‘미완의 항쟁’으로만 남게 되었다. 이 연구의 요체는 ‘부마항쟁의 진실과 역사적 성찰’이란 주제에 걸맞게 부 마항쟁이 어떻게 발발하고 전개되었으며, 또 어떻게 진압되었는지를 부산항 쟁과 마산항쟁의 주요 쟁점을 통해 비교고찰 하고자 하는 것이다. 특히 대 학생과 민중이 주도한 부마항쟁의 시위전개와 경찰과 군에 의한 시위진압 이 서로 부딪치면서 박정희 대통령 및 권부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구 체적으로 논의해 보고자 한다. 부마항쟁은 올해로 39주년을 맞는 과거사가 되었으나 아직도 진상규명이나 명예회복 등의 문제가 산적해 있어 법제도 의 정비 등, 우선적으로 해결할 것이 많은 현대사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일 단의 세력들이 항쟁의 주도자인 양, 여러 가지 기록물이나 증언을 통해서 부마항쟁사의 진실을 호도하고 농단하는 작태로 진실규명에 어려움을 주고 있다. 부마항쟁의 진실규명을 위해서는 객관적인 자료의 획득, 항쟁관련자 의 증언 청취나 현지조사 등이 필요하며, 항쟁사의 진실을 호도하고 농단해 온 세력에 대한 법적․사회적 응징과 대응도 필요하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