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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1.09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본 연구는 정저우시에 최근 조성된 상성유적공원, 상성공원, 인민공원, 자형산공원 등 4개 유적지 공원을 대상으로 6개의 경관요소 즉, 전통수종, 역사적 폐허 및 유적, 전통건축, 조형물, 도로포장 및 소재, 수경요소 등의 측면에서 지역문화경관의 적용 및 문제점을 분석 평가하고자 하였다. 분석결과, 전통건축과 역사적 폐허 및 유적의 관리 측면에서 문제점이 드러났다. 상성 유적공원, 상성공원, 자형산공원에 조성된 전통건축은 모두 송나라 이후의 건축양식을 따르고 있어 상나라시대의 건축적 특징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인민광장의 경우 유적은 반개방적인 방법으로 보존 전시하고 있으나 부실한 관리로 인해 유적의 인위적인 훼손이 심각하고 특히 유적지의 고목들이 벽체를 크게 훼손하고 있다. 조형물 측면에서는 인민광장의 경우 상나라시대와 관련된 조형물이 없으며 도로포장 측면에서는 상성유적공원과 상성공원의 일부에만 문화적 토템이 적용되었을 뿐 공원 도로포장의 대부분이 현대식 포장으로 인해 지역의 역사문화적 특성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전통 수종 측면에서는 상성유적공원과 인민광장의 경우 대부분 전통수종을 식재했으나 상성공원 및 자형산공원의 경우 외래수종이 많아 지역 고유의 자연경관 을 연출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들은 면밀한 역사적 고증을 바탕으로 지역문화경관의 구성요소 및 설계원칙을 고려하여 개선해 나갈 필요가 있다. 수경요소는 자형산공원에만 적용 되었으나 지역특성을 상징하는 황하강을 모티브로 한 은유적 설계의 적용이 부족하다. 지역의 역사문화에 대한 은유적 표현 방법과 의미 해석에 대한 다양한 연구가 선행되어야 하는 만큼 향후 이에 대한 지속적인 논의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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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3.05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한계산성에 대해서는 그간 정확한 규모나 상성, 하성의 구조와 접근로, 기타 내부 건물지나 부대시설물지에 대한 현황이 분명하게 파악되지 못하였는데, 지난 2010년부터 필자가 조사하여 새롭게 확인된 사항은 대략 다섯가지이다. 첫째는 상성과 하성의 구분이 명확하게 확정되었다는 점이다. 종래 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되어 있는 바, 상성(上城)과 하성(下城)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구분이 분명하지 않아 막연하게 천제단 근처가 상성이라고만 여겨져 왔으나 이번 조사에서 상성의 구조와 위치가 명확해 지게 되었다. 둘째는 하성의 새로운 건물지가 확인되었다는 점이다. 기존에 하성내에서는 계곡부 동측에서만 건물지가 확인되었으나 이번 조사에서 그 계곡 반대편에도 여러 건물지와 바위그늘 주거지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셋째는 상성내에서 새로운 유물 출토지를 찾았다는 점이다. 기존에 상성내에서의 유물은 대부분 대궐터에서 수습되었으나 이번 조사에서 여러 곳에서 새로운 유물이 채집되었다. 넷째는 산성 원성(元城)과 별개로 축조된 돈후(墩堠) 시설물이 2개 지점에서 확인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교통로에 대한 근접 감시는 물론 일시적인 차단을 통한 지연전을 전개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다섯째는 산성으로의 다섯가지 출입로가 정확하게 파악되었다는 점이다. 산성의 운용과 관련하여 출입로 파악은 매우 중요한 사항인 바, 이번 연구를 통하여 산성으로의 접근로가 명확하게 파악되게 되었다. 한계산성은 초축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고려사(高麗史)에 기록되어 중세시기 활용에 대한 명확한 역사기록을 가지고 있다. 특히 대몽항전(對蒙抗戰)의 마지막 단계에서 승전한 역사적인 장소이다. 1259년(고종 46) 몽고에 투항한 조휘 일당이 몽고 군사를 끌고 와서 산성을 공격하였으나 점령하지 못하였고 오히려 산성을 지키고 있던 방호별감(防護別監) 안홍민(安洪敏)이 야별초군(夜別抄軍)를 거느리고 나아가 습격해 모두 섬멸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중부내륙 지역이 몽고의 약탈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이 전투에서 승전하였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고려 공민왕 당시 반원정책을 추진하면서 군사적 긴장이 높아지자 한계산성을 확장하면서 크게 개축한 것은 바로 대몽고전에서 승전하였다고 하는 사실과 직접 관련이 있다. 그러한 역사적 의미 뿐만 아니라 한계산성은 중세시기 험지위주 산성의 전형적인 사례로, 성곽의 확장, 별설의 돈후(墩堠) 시설물 축조 등 중세 산성의 특징적인 형태를 잘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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