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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8.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아르고노트섬에 대한 기존 연구는 영국의 상선 아르고노트호가 1791년 여름 울릉도 부근 해상에서 섬을 발견한 것에 관한 기본적인 정보를 밝히는 수준에 머물렀는데, 이 연구는 의문의 섬 아르고노트를 발견한 영국 탐험가 제임스 콜넷의 생애, 세계일주 배경과 항해 경로, 아르고노트호의 동해진출 배경과 의문의 섬의 발견 과정을 구체적으로 밝히는 것이 목적이다. 연구결과, 첫째, 콜넷의 2차 해달 모피 무역 항해는 북서 태평양 해안의 모피 무역 중심지였던 누트카에 영구적인 거점을 마련하는 동시에 모피를 중국에 판매하는 것이 목적이었으며, 둘째, 콜넷 선단이 해달 모피를 싣고 마카오로 들어가던 무렵, 중국 정부가 모피 무역 금지령을 내림에 따라 콜넷 일행은 새로운 판로를 개척하기 위해 조선과 일본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셋째, 조선과 일본에 접촉을 시도하였 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으며, 또 다른 판로를 찾기 위해 조선의 동해안을 따라 북상하다가 울릉도 부근 해상에서 발견했다 는 ‘의문의 섬’은 서구의 지도제작에 반영되어 반세기 이상 전파·유통되었다. 넷째, 1798년 지도에는 아르고노트호가 악천후를 만나 방향타가 부러진 지점만 표현되었는데, 1811년 지도에는 실존하는 섬으로서의 아르고노트가 표현되기 시작하였다. 결과적으 로, 19세기 중엽 일본 해군성이 영국에서 제작된 해도를 모사하는 과정에서 일본은 그들이 전통적으로 인식하고 있던 다케시마(울릉 도)와 마쓰시마(독도)를 아르고노트와 다즐레에 비정함에 따라 일본식 독도명칭이었던 마쓰시마는 울릉도를 가리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4,000원
        2.
        2002.03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18세기 영국은 시대적 변혁기였다. 영국은 대외적으로는 단속적으로 전쟁을 계속해야 했고, 내적으로는 산업 사회로 전환하고 있었다 영국의 선주들은 계속된 전쟁과 선박량의 팽창으로 인해 선원 부족 문제에 직면하였다. 영국 선주들은 이에 대해 척당 선원 수를 줄이고, 선원의 임금을 올려줌으로써 해결하고자 했다. 18세기가 경과하는 동안 영국 상선의 척당 선원 수는 지속적으로 감소하였다. 1710년 100톤급 선박 1 척당 22-23명이던 선원수는 1810년에는 5명으로 급감하였다. 이처럼 척당 선원 수가 감소한 것은 조타기, 양묘기, 권양기 등의 기계가 도입되고, 선박과 범장의 개량이 꾸준히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18세기 내내 단속적으로 전쟁이 계속되었기 때문에 선주들로서는 적은 선원으로 선박을 운항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선주들은 임금을 올려줌으로써 선원들을 해상 생활로 유인하고자 했다. 18세기 중엽25실링에 불과했던 선원의 임금은 프랑스혁명전쟁기에 이르면 5-10파운드까지 치솟았다. 척당 선원 수가 감소하고 선원의 임금이 꾸준히 상승한 것은 전쟁이 지속된 18세기에 영국의 선주들이 급변하는 해운 환경에 적절히 대응한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