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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后山許愈(1833-1904)를 배출한 三嘉縣의 金海許氏가문은 경상우도에서 문호 를 유지해 왔다. 고려말기 許麒에 의해서 固城에 정착하여 金海許氏가문을 형성 하였다. 다시 허기의 현손 竹溪許珣이 三嘉縣佳會里德村에 移居하였다. 본래 는 무관의 가문이었으나 竹溪의 아들 晩軒許彭齡이 南冥문하에 나아가 공부함 으로 인하여 武業을 버리고 儒學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晩軒은 南冥을 享祀하는 晦山書院창건을 주도하였고, 창건 이후에 회산서원 에 매달 초하루 焚香할 정도로 남명에 대한 존모의 정도가 지극하여 유가로서의 기반을 확실히 잡았다. 그의 두 아들은 倡義하여 忘憂堂郭再祐휘하에서 군공을 세웠고, 또 형제 둘 다 문집을 남겼으니, 유학에 조예가 깊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아들 滄洲許燉대에 와서, 문과에 급제하여 文名을 날리고, 대북정권에 협 조하지 않는 절조를 지켰으므로 家數를 크게 제고시켰다. 이후 강우의 비중 있는 가문이 되었다. 滄洲의 손자 臥龍亭許鎬는 굉장한 경륜을 가져 북벌을 담당할 將臣에게 세 가지 계책을 제시할 정도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신실한 선비로서 처신하였는 데, 주로 江左의 학자들과 교류가 깊었다. 晦山書院창건을 주도할 정도로 南冥을 존숭하는 가문이면서 아울러 退溪도 존숭하여, 두 대학자의 장점을 융합하여 발전시키려는 가문의 전통적 학풍을 갖고 있었다. 아울러 倡義를 하는 등 우국연민의 구세정신도 여타 가문보다도 더 강렬 하였다. 이런 전통은 后山에게까지 면면히 이어져, 雷龍亭을 중건하는 일을 주관하고 뇌룡정의 강학을 주도하고 神明舍銘或問이라는 神明舍銘에 대한 역사상 가 장 상세한 주석을 달면서도, 퇴계의 학문을 존숭하여 聖學十圖附錄이라는 聖 學十圖에 대한 精深한 주석서를 내고 있다. 남명과 퇴계를 대립적인 구도로 파 악하지 말고, 후학들이 두 대학자의 좋은 점을 상보적으로 배운다면, 국가민족을 위해서도 도움이 될 것이라는 것이 후산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학문은 늘 구세정 신이 있어야 그 존재가치가 있다는 문학관을 갖고서, 문장을 지을 때도 世敎에 도 움이 되지 않으면 지을 필요가 없다고 후산은 생각했다. 후산은 남명․퇴계 우리나라 양대 학자의 학문을 조화롭게 아우른 家學의 바탕 위에서, 寒洲에게 나아가 心卽理說을 배워 계승하여, 19세기 강우지역을 대표할 수 있는 대학자로 성장하여 많은 제자들을 길렀으며 강우의 학문이 부흥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