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에 대한 제사는 중국문명의 신앙적 측면에서 가장 현저하게 발견 되는 특징으로, 영국의 제임스 레게(James Legge, 1852)에서 미국의 슈왈츠(Benjamin I. Schwartz, 1985)에 이르기까지 세계적으로 공통된 인식으로 형성되었다. 불교와 기독교(천주교)는 시간 격차를 두고 중국에 유입되는 과정에서 제사 제도와 격렬한 충돌이 일어났었는데, 불교 는 중국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제사 제도와 상호 침투, 흡수에서 나아가 혼합, 융합의 단계로 나아가게 된 반면, 기독교에서는 제사를 종교 전파의 최대 장애물로 간주하여 ‘미신’이라는 딱지를 붙여 거부하고 배척하였다. 불교와 기독교가 제사라는 분수령에서 상반된 길을 가게 된 이유를 찾기 위해 우리는 우선 고대 제례의 원류에 해당되는 기록인 의례(儀禮) <특성궤식례(特性饋食禮)>에서부터 분석을 시작하고자 한다. 해당 경전에서 4단 20절로 구성 되어있는 의례 과정에 대한 세밀한 정리 분석을 통해 제주(祭主)가 자신보다 아래 항렬의 가족 중 한 명을 골라 조상신을 대신하는 ‘시’로 세우는 것은 전 과정을 관통하는 중요한 구성단위임을 알 수 있다. ‘시’와 제주의 현실 신분 속 ‘존비(尊卑)의 도치’, ‘아버지가 아들에게 절을 올리는’ 의례 과정의 설계 목적은 종친 중 가장 존엄한 위치에 있는 제주가 이로 인해 가질 수 있는 자만 심과 오만함을 억제하는 데에 있으며, 제주를 위시한 종친과 내빈이 모두 ‘시’에 대해 예로서 경의를 표함으로서, 성실과 공경을 전체 예의(禮 義)의 핵심으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나아가 고대의 제사 의례는 재계(齋戒), 향신(饗神), 교접(交接), 혈식(血食), 합족(合族)이라는 다섯 단계로 형성되었으며, 의례의 핵심인물인 주인은 ‘시’와 빈객들과 같이 기일 3일 전부터 재계(齋戒)에 들어가며 안에서 밖으로 보여주는 모든 언행과 행동, 바치는 제품(祭品)과 상호 간의 교접(交接) 등 전체 과정을 모든 참배객에게 보여주게 되니, 그 과정을 지켜보는 단계에서 본 받는 단계로 나아가게 되며, 정성을 다하여 공경하는(誠敬) 예는 외연적으로 확장되어 제례 현장에 있는 모든 종친들에게 영향을 점차 주게 되는 것이다. 진한시대 이후, 시를 세우는 의례가 점차 폐지됨에 따라 제례의 형식도 본래 조상에 대한 제사 중심에서 황제의 하늘에 대한 제사로 그 핵심이 옮겨가게 되었다. 동시에 조상 제사의례의 구조는 다소 느슨해지기 시작하여 불교 등 요소가 대량 침투하게 되었으며, 특히 민간사회에서 신주(神主), 분향(焚香), 소식(素食), 재회(齋會), 소지(燒紙) 등과 같은 새로운 의절(儀節)이 생겨나게 되었다. 의절의 변화는 조상 제례의 핵심이 초기의 성경(誠敬)에서 기복신앙, 즉 인과응보 관념으로 옮겨졌다는 것을 반영한다. 송원시대 이후 유불도 삼교의 상호 침투와 영향이 점차 깊어지고, 명청시대 이래의 민간신앙은 삼교가 상호 교차 하고 혼합되어 서로 구분할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바로 역 사에서 말하는 ‘삼교합일(三敎合一)’이자 양경곤(楊慶堃)이 칭한 ‘확산형 종교(彌散性宗教)’ 현상인 것이다. 유생과 승려들은 이와 같은 종교의 뒤섞임, 세속화, 공리화 등 경향에 대해 격렬한 비판을 가한 바 있는데, 그것이 ‘진위를 가려내지 못하기(眞僞不辨)’ 때문에 ‘개돼지만도 못하게 전락하였다(落狗彘之下)’(지욱智旭 스님의 말)라고도 하였다. 사실 이러한 주장은 여전히 성경을 예의의 핵심으로 보는 입장에서 내세운 평가로서, 민간제사의 핵심예의는 ‘보(報)’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데서 나오는 견해이다. 민간불교는 그 숫자가 지극히 방대한 기층 백성들의 지 지를 얻었기 때문에 유교, 도교에 비해 더욱 광범위한 사회적 기반을 다지게 되었다. 불교는 이로 인해 방대한 ‘기층의 힘(基層的活力)’(이천 강李天綱의 말)을 획득하게 되어 뿌리내릴 곳 없는 ‘떠돌이 영혼’이 되어버린 유교와는 달리 수백 년간 파란만장한 부침을 겪고 나서도 현재 까지 전승될 수 있었던 것이다.
한국 개신교에서는 교단마다 다소 차이는 있지만, 제사가 큰 어려 움 없이 추도예배로 정착된 것 같다. 그러나 제사문제가 모두 해결된 것은 아니다. 모 교회 주일예배를 참석하는 중 대표기도 하는 분이 추석을 맞이하여 고향을 찾는 성도들이 ‘바람직하지 못한 예식을 참여함 으로’ 믿음을 흐리게 하는 일이 없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바람직하지 못한 예식’이라 함은 물론 제사를 칭하는 듯하다. 조상제사는 신자의 가정에서 추도예배로 대치하기 때문에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지만, 결혼하여 불신자 가정에서 생활하든지 혹은 불신자 가정에서 예수를 믿게 되어 그 집안에 첫 신자가 되었을 때 제사 문제로 인한 갈등은 피할 수 없어 보인다. 복음이 전파된 후 한국 천주교는 정부의 극한 박해를 거쳐 조상제사 를 신학적으로 재해석하여 제사문제를 우상숭배가 아닌, 조상에 대한 공경인 제5계명으로 이해하여 더 이상 교인들이 조상제사에 대해 고민 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이 결과는 나름대로 조상제사에 대한 비판적 상황화가 이루어졌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한국 개신교는 복음이 전파된지 약 13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조상제사에 대한 일치된 해석이 없어 신자들은 불신자 가정에서 행해지는 조상제사 의식 앞에서 어떻게 처신을 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절을 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고민해야 한다. 세계관(worldview)이란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이다. 어떤 세계관 을 가지고 조상제사를 이해하느냐에 따라 조상제사에 대한 태도가 다를 수밖에 없다. 조상제사의 의미는 신학적인 조명과 함께 그 문화 안에서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의 인식, 가치, 의식구조, 평가 등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결정된다. 그 결정된 조상제사의 의미는 내부자 스스로의 상황화 과정을 통하여 현지문화에 정착이 되고, 마지막으로 그 상황화가 삶의 현장으로 이어질 때 가장 바람직한 성육신적인 선교가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러므로 본 소고는 신학적 접근으로는 조상제사와 상황화를, 문화적인 접근으로는 조상제사와 세계관을, 그리고 끝으로 삶의 현장으 로 조상제사와 성육신에 대해 기술하려고 한다. 이들이 서로 별개의 것이 아닌, 상호간에 연관이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본 소고로 불신자 가정에서 갈등하는 신자들이 조상제사에 대한 이해가 다소 넓어지고 타문화 사역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조그마한 선교적인 교훈이 되기를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