松臺 河璿(1583-?)은 경상남도 진주시 수곡면 사곡리에 세거한 晉陽河氏 判尹公派의 士人이다. 그의 조부는 喚醒齋 河洛(1530-1592) 이고, 從祖父는 覺齋 河沆(1538-1590)이며, 伯父는 松亭 河受一 (1553-1612)인데, 이들은 모두 南冥 曺植(1501-1572)의 高弟이다. 이로써 수곡의 진양하씨는 江右 지역 南冥淵源家를 대표하는 문중임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4월 경상북도 상주에 있던 조부와 부친이 함께 왜구의 손에 목숨을 잃었고, 당시 열 살이던 하선은 진주 수곡 으로 돌아와 일생 문중을 건사하고 계승하는 것으로 삶을 영위하였다. 이후 나라에서 조부와 부친의 죽음을 忠孝의 표상으로 추숭하여 旌閭 하였고, 이를 계기로 송대의 가문은 忠孝家로서의 위상을 드러낼 수 있었다. 하선은 선현을 현양하고 후손에게 계승시켜 주기 위해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만년에 『松亭集 』과 『覺齋集 』의 跋文을 쓰고, 문중의 世系를 정리했으며, 나아가 상주에 있던 조부와 부친의 묘소를 수곡으로 이장하고 白軒 李景奭(1595-1671)·東溟 鄭斗經(1597-1673) 등 당대 저명한 인물에게서 조부와 부친의 墓碣과 碑文을 받아냄으로써 문중의 위상을 드높였다. 이는 松臺家의 후손이 이후 수곡 진양하씨 문중의 일원으로 세거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한 대표적 활동이었다. 또한 하선은 지방에 세거한 재야지식인이었으나 전란 이후 국가의 시책에 끊임없는 관심을 보였고, 특히 전란의 참상을 몸소 체험한 만큼 兵制의 폐단에 더욱 절실하였다. 효종 임금이 즉위한 후 재야인사에게 국정에 반영할 시책을 구하자, 하선은 5천여 자의 상소문을 지어 당시 만연하던 여러 폐단과 이를 해결한 구제책을 올렸다. 조정에서는 이 상소의 내용을 인정하여 公論으로 하선에게 主簿 벼슬을 하사하였는데, 이로써 하선의 士意識과 현실인식이 당대에도 인정받을 만큼 시의 적절한 것이었음을 확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