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논문은 허균의 한시 선집인 國朝詩刪에 대한 문헌적 검토로, 현전 이본을 조사하고 계열화 하여 國朝詩刪의 선본을 확인하고 앞 으로의 연구 방향에 대해 제안한 것이다. 그동안 國朝詩刪에 대한 연구는 주로 목판본을 대상으로 하였는데, 이 목판본은 허균의 ‘원본’을 목판 간행자인 박태순이 재편집한 결과물이다. 따라서 허균의 國朝詩刪을 바르게 읽어내기 위해서는 원본의 모습을 재구할 필요가 있다. 이에 이 논문에서는 실본 조사에 앞서 우선 허균이 남긴 國朝詩刪과 관련된 기록들을 살펴서 ‘원본’의 모습을 알아보았다. 허균의 기 록을 근거로 하여 국내외 기관과 대학도서관 등에 흩어져있는 國朝詩刪을 발굴, 검토하여 원본의 모습을 보여주는 이본들과 그렇지 않은 이본들을 ‘원본 계열’과 ‘목판본 계열’로 나누어 검토하였다. 그 결과 ‘허균의 國朝詩刪’ 연구는 원본 계열을 중심으로 재논의 되어야 하며, 특히 현재 완질로 전해지는 원본 계열 동국대본에 주목할 것을 제안하 였다. 한편, 지금까지 國朝詩刪과 관련된 연구 성과들이 목판본으로 진행된 것임을 감안하여 목판본과 원본이 어떤 차이를 보이는지에 대해서도 정리해보았다. 이제 목판본 계열은 허균과 관련된 연구보다는 國朝詩刪의 유전과 목판 간행의 의의, 후인의 전대 문헌 가공에 대한 주제로 활용되어야 할 것이다.
鶴山樵談은 許筠(1569~1618)이 25세 되던 1593년 강릉에서 기록한 시화 집이다. 鶴山은 허균이 이 시화를 저술하던 시기에 머물렀던 愛日堂 북쪽에 있 는 靑鶴山이다. 학산초담 後記에서 애일당이 있는 뒷산의 이름을 따서 蛟山 子라는 호를 처음 썼다. 허균은 아직 문과에 급제하기 전이라 ‘청학산 나무꾼의 이야기’라는 정도로 겸손하게 책 이름을 붙인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필자가 현재까지 확인한 학산초담 이본은 6종이다. 이인영의 장서인 淸芬 室文庫에도 학산초담이 소장되어 있었지만, 현재 행방을 알 수 없다. 李仁榮 은 경성제국대학을 졸업하던 1937년부터 고서를 수집했는데, 희귀본 540종의 해제를 작성하여 1944년에 淸芬室書目을 탈고하였다. 그가 소개한 학산초 담의 서지에 「寒皐館外史題後」를 인용 소개하였지만, 출전을 담정유고라고 밝힌 것을 보면 한고관외사에서 전사한 것은 아닌 듯하다. 10행 24자라는 필 사형식도 다르다. 현재 확인된 6종 가운데 규장각 소장본만 단행본이고, 다른 5종은 叢書에 실 려 있다. 가장 오래된 본은 이장재가 1790년에 편찬한 청구패설에 실려 있다. 패림이 일찍 영인되어 널리 알려졌지만, 김려가 편찬한 한고관외사도 패림 보다 시기적으로 앞선 총서이며, 패림은 한고관외사와 창가루외사를 저본 으로 해서 편찬했다. 패림에 실린 학산초담은 당연히 한고관외사를 베낀 것인데, 내용과 형태가 같을 뿐만 아니라 글자의 위치까지도 그대로 베꼈다. 그 러나 패림본에 빠진 구절들이 한고관외사본에는 온전하게 실려 있다. 한 고관외사본을 놓고 필사하는 과정에서 빠진 것이다. 대동패림본은 35칙만 필사되어 자료적 가치가 적으며, 장서각본도 청구패 설본이나 규장각본과 같은 내용이어서 자료적 가치가 적다. 청구패설에 실린 학산초담이 가장 앞선 본이기는 하지만, 주석이 정연하 기로는 한고관외사본을 따를 수 없다. 欄上의 기록이 덧붙긴 했지만, 체제가 정연하지 않다. 현재 확인되는 이본만 놓고 본다면 夾注는 김려의 한고관외사 에 실린 학산초담에서 시작되었으니, 김려가 정본을 만드는 과정에서 협주를 붙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이 문제는 더 많은 이본을 확인한 뒤에야 확실히 판단할 수 있다. 필사 습관에 따라 다르게 쓴 글자들은 선본 확정에 큰 문제가 아니다. 패림본이 한고관외사본을 충실하게 전사했지만 몇 군데 잘못된 부 분이 있어, 현재로서는 한고관외사본이 가장 선본이라고 판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