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서는 1970년대에 흔암리 청동기시대 유적에서 출토된 탄화미를 현재까지의 식물고고학적 성과를 바탕으로 그 의의를 재검토한다. 흔암리유적에서는 우리나라 최초로 작물유체를 찾기 위한 물체질이 실시되었고, 최초로 청동기시대 탄화미가 검출되었으며, 최초로 탄화미의 개별 계측치가 보고 되었다. 또한 최초로 고고학 유적에서 볏짚의 식물규산체가 발견되었다. 흔암리 탄화미는 흔암리형 이라 부를 수 있을 정도로 동아시아에서 매우 독특한 극단립이다. 또한 크기 분포에서 정형성이 떨어지는 점이 특징적이며 이러한 현상이 복수 지점에서의 시료 채취, 품종의 유전적 다형성, 수확 시기의 차이, 표본수 부족 등에서 기인하였을 가능성을 검토하였다. 흔암리유적에서 기존에 보고된 수수와 조는 동정 오류이고 보리는 후대에 혼입된 미탄화종자이기에 결과적으로 흔암리유적에서는 벼만 출토된 것이다. 그러나 중부지방 역삼동-흔암리유형 주거지 작물조성을 고려하면 청동기시대의 흔암리는 벼가 주곡이지만 잡곡을 포함한 밭작물도 재배되었을 가능성은 여전히 상존한다.
이 논문은 전기 청동기시대에 출토된 무문토기 가운데 취사에 사용된 토기를 중심으로 다루었다. 중서부지역의 천안 백석동, 운전리 유적을 중심으로 취사의 용도로 사용된 토기를 살펴본 결과 주로 발형토기가 그 기능을 담당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취사용 발형토기와 취사용으로 사용되지 않은 발형토기의 형태적 특징을 비교해 본 결과‘취사’라는 특정한 용도에 알맞도록 제작되지 않았음을 알 수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그 당시 천안 백석동, 운전리 유적에서 토기를 만들어 사용한 집단의 토기 제작및 사용에 대한 관념과 관련이 있다. 취사용토기가 용도에 적합한 특정화된 속성을 가지고 제작되지않았음은 전기 청동기시대 당시 천안 백석동과 운전리 유적에 거주했던 사람들이 토기를 제작할 당시 취사의 기능을 의도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토기를 제작할 때 그 쓰임새가 미리 부여되는 것을‘의도된 기능(intended function)’이라 본다면 그것이 실제로 사용되는 것은‘행위적 기능(actual function)’이라 볼 수 있다(James M. Skibo 1992). 토기의 크기, 구연부형태, 구순형태, 동최대경의 위치, 저부형태, 문양 등은 토기 제작 당시 결정되는 요소이다. 속성의 차이는 기능의 차이를 반영하는데, 토기에 나타나는 속성들은 정해진 기능에 알맞도록 그 당시‘의도된 기능’에 따라 적합하게 제작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제작된 토기는‘행위적 기능’으로 처음 제작 의도에 맞게 사용되기도 하고 다르게 사용되기도 한다. 취사용토기가 특정화된 형태로 제작되지 않았음을 볼 때‘취사’는‘행위적 기능’의 맥락이라 여겨진다. 따라서 전기 청동기시대 천안 백석동, 운전리에서 거주하던 집단에 있어 취사 기능이 토기 제작이라는 범주에서 독립적인 위치를 차지하지 않았다고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