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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靑銅器學報 KCI 등재 한국청동기학보 Journal of Society for Korean Bronze Cul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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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호

제4권 (2009년 6월) 4

1.
2009.06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남한지역 무문토기의 편년은 돌대문토기를 표지로 한 早期의 설정이 이루어지면서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미사리·옥방 5지구유적 등과 같이 돌대문토기만을 반출하는 주거지가 조기의 표지적인 유적이며, 옥방 5지구·수가리유적의 연대측정 결과를 근거로 조기를 신석기시대 말기와 병행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와 突帶文土器외에도 二重口緣土器등 조기에 다양한 토기가 병존했을 가능성을 염두해 둔 견해가 있다. 미사리유적에서 출토된 유물로서는 조기의 유물조합상황을 파악하기 어렵고, 옥방5지구와 동일하거나 더 높은 연대측정자료들이 많기 때문에 신석기말기까지 조기를 올려보기는 어렵다. 무문토기시대 조기는 돌대문토기·이중구연토기의 주류속에 鋸齒文土器·孔列文土器·橫帶區劃文土器등이 병존하였으며, 신석기시대 말기 다음에 이어지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무문토기시대 전기는 2000년대 이후 역삼동식토기·가락동식토기·흔암리식토기가 병존하는 것으로 논의가 정립되었으나, 최근 複合文에서 단순문으로의 변화, 즉 가락동식토기·흔암리식토기→역삼동식토기로의 변화가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역삼동식토기가 뒤늦게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지역에서 장기간 존속하였다는 지역적인 특징으로 보아야 한다. 전기의 특징은 돌대문토기가 소멸되며, 이중구연토기는 類似二重口緣의 형태로 변화하며, 역삼동식토기·흔암리식토기 등 孔列文系土器의 확산과 더불어 지역적 특징이 나타난다. 남한의 무문토기 조기는 동북한지역 보다는 요동~서북한지역과의 관련성이 높은데, 쌍타자·대취자Ⅲ기, 신암리Ⅱ기, 공귀리·심귀리Ⅰ기, 세죽리Ⅱ1기, 구룡강Ⅰ기, 흥성Ⅲ기, 오동Ⅱ기, 서포항Ⅴ기등과 병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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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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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전기 청동기시대에 출토된 무문토기 가운데 취사에 사용된 토기를 중심으로 다루었다. 중서부지역의 천안 백석동, 운전리 유적을 중심으로 취사의 용도로 사용된 토기를 살펴본 결과 주로 발형토기가 그 기능을 담당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취사용 발형토기와 취사용으로 사용되지 않은 발형토기의 형태적 특징을 비교해 본 결과‘취사’라는 특정한 용도에 알맞도록 제작되지 않았음을 알 수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그 당시 천안 백석동, 운전리 유적에서 토기를 만들어 사용한 집단의 토기 제작및 사용에 대한 관념과 관련이 있다. 취사용토기가 용도에 적합한 특정화된 속성을 가지고 제작되지않았음은 전기 청동기시대 당시 천안 백석동과 운전리 유적에 거주했던 사람들이 토기를 제작할 당시 취사의 기능을 의도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토기를 제작할 때 그 쓰임새가 미리 부여되는 것을‘의도된 기능(intended function)’이라 본다면 그것이 실제로 사용되는 것은‘행위적 기능(actual function)’이라 볼 수 있다(James M. Skibo 1992). 토기의 크기, 구연부형태, 구순형태, 동최대경의 위치, 저부형태, 문양 등은 토기 제작 당시 결정되는 요소이다. 속성의 차이는 기능의 차이를 반영하는데, 토기에 나타나는 속성들은 정해진 기능에 알맞도록 그 당시‘의도된 기능’에 따라 적합하게 제작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제작된 토기는‘행위적 기능’으로 처음 제작 의도에 맞게 사용되기도 하고 다르게 사용되기도 한다. 취사용토기가 특정화된 형태로 제작되지 않았음을 볼 때‘취사’는‘행위적 기능’의 맥락이라 여겨진다. 따라서 전기 청동기시대 천안 백석동, 운전리에서 거주하던 집단에 있어 취사 기능이 토기 제작이라는 범주에서 독립적인 위치를 차지하지 않았다고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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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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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국리유적의 남서쪽에 해당하는 54지구는 1974년 이래 가장 집중적인 조사가 이루어진 지역이다. 특히 서쪽으로 뻗은 舌狀의 구릉성 대지는 주변조망이 용이한 곳인데, 삭토와 성토공사로 대지를 정지, 확장한 후 목책을 설치한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런데, 최근 시행된 조사를 통하여, 목책으로 인식되었던 주열의 성격이 대형 굴립주건물로 판명되었고 이를 중심으로 하는 특수한 구획시설의 존재도 확인되었다. 이 시설은 대지의 북동쪽과 남동쪽에 각각 11×1칸의 대형 굴립주건물을 배치하고 건물의 주위와 대지의 서쪽을 견고한 鬱柵으로 둘러싼 특이한 구조를 띠고 있다. 건물을 둘러싼 울책의 내외에 前庭과 廣場을 두고 망루로 추정되는 주혈군과 1×1칸의 굴립주건물을 배치하였다. 이러한 구조는 이 공간이 취락 내에서 특별히 구별된 공간으로서 격리·보호·방어적 성격과 함께 공공 집회를 염두에 둔 광장적 성격을 동시에 갖고 있음을 시사한다. 송국리 취락이 수전 농경을 기반으로 형성된 취락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대형 굴립주건물은 곡물을 저장, 보관하는 고상창고였을 가능성이 높으며 이와 함께 농경과 관련한 의례행위도 함께 행해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즉, 송국리취락의 특수공간은 생산물의 저장·관리공간인 동시에 의례공간으로 판단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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