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동기시대 논 경작지에 대한 연구는 입지와 구조, 그리고 수리 관개시설에 대한 논의가 있어 왔다. 논의 구조와 수리관개 시설의 관계를 통한 변화의 모습을 파악하기도 하지만, 입지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아직 구체적 논의는 없다. 본고는 논 경작지의 구체적 입지환경을 분석하여 이를 유형화하고 수리관개시설의 변화와 함께 살펴보았다. 그 결과 이른 시기부터 논 입지는 저습한 지역을 선택하였고, 이의 변화 과정에서 수리관개시설의 설치와 함께 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청동기시대 논 경작지는 다양한 조건과 환경을 갖춘 곳을 선택하지만 주로 저습한 지형 모두를 이 용하였다. 특히 충적지형에서는 미세한 지형 조건에 맞추어 입지 선택을 달리하는데,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입지 변화는 논의 구조와 형태, 기술의 진보와도 연관된다. 현재 논의가 분분한 구상과 반구상 경작유구는 전형의 논 등장 이전에 나타난 밭에서 논으로 이행하는 과도기적 경작지로 파악되는데, 그 형태와 구조, 관개의 방식이 초기 경작지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이후 과도기를 거치고 논 경작지는 점차 완성되는 모습이다. 당연 그 과정에서는 입지환경이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입지는 처음에는 완만한 충적지형의 미곡저지를 선택하였는데, 용수의 취득을 우선한 결정이었다. 이후 저습한 환경의 입지를 고루 선택하면서 본격적인 논 경작의 과정을 진행해 간다. 물론 이 과정에서도 완전한 형태의 논 경작지 조성보다는 천수에 의존한 경작지 조성을 주로 하였을 것이다. 그러면서 점차 입지 환경을 극복하는 모습이 보이는데, 이는 수리 관개 시설의 등장과 함께 하고 결국에는 논 경작지와 수리관개시설은 완성된 조합으로 이어진다.
본 글은 우리나라 청동기시대에 송국리형문화를 기반으로 하는 거점취락을 대상으로 사회발전 양상을 살펴보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송국리형문화 단계가 과연 어떤 형태의 또는 어떤 수준의 사회였는지 들여다 보기 위함이다. 이를 위하여 당시 취락사회의 정치, 경제, 사회, 이념체계와 관련되는 고고학적 맥락을 추출하여 사회적 수준과 발전양상을 살펴보았다. 송국리형문화의 취락사회는 Chiefdom 사회에 깊숙이 진입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모든 취 락사회가 동일한 체계로 운영된 것은 아니었다. 우리의 고고학적 환경에서 사회 발전과 변화에 영향 력을 행사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핵심요소들은 거점취락에서 활성화되어 있었다. 족장 성격을 갖는 유 력자의 존재와 지도력, 유력자와 그 공동체 또는 세력집단 간 갈등과 같은 사회현상, 대규모 공사를 위한 노동력의 집결과 부의 재분배, 위세품의 존재와 장거리 교역, 사회적 위계화와 장인집단(전문 화·분업화)의 존재, 거점취락과 지역사회의 유기적인 연계망, 사회결속을 위한 취락의례(제의)의 존 재 등은 송국리형문화단계의 취락사회, 특히 거점취락에서 볼 수 있는 현상들이었다. 비록 모든 취락 사회에 적용될 수 있는 일반화·보편화 현상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Chiefdom 사회의 발전 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문화요소들임에는 부정할 수 없다. 송국리형문화를 영위했던 다양한 취락사회는 내적·외적으로 사회적 관계와 지역적 적응 속에서 상사·상이한 체계로 발전해갔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공통되는 사회발전 양상과 지역성을 고려하여 우리 형편에 맞는 사회발전 모델과 범주의 체계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본고는 송국리유적의 시기와 성격 및 그 학술적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하기 위하여 작성되었다. 먼저 최신 발굴 조사 성과를 바탕으로 유적의 시기와 성격을 살펴본 결과, 최초 대지 조성과 함께 방형계 주거 집단의 점유가 시작된 이후 원형계 집단이 등장하면서 대지 조성면을 목주열이 자리하는 공간으로 활용하였으나, 기존의 주거형을 일부 인정하여 양자를 모두 축조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점유 기간의 공백은 없었으며, 전체 기간도 짧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한편, 송국리유적에서는 유력자 또는 유력 집단의 존재가 상정되는데, 그들은 대규모 노동력 동원, 식량 조달 및 분배에 대한 적극적 개입, 제사권 장악 등을 통해 지배력을 강화하였을 것이다. 일반 주민들도 어느 정도 안정적인 삶을 유지하여 인구가 점차 증가하였으며, 이와 같은 내부적 안정을 바탕으로 주변 유적들과 다양한 관계를 맺으면서 그 정점에 위치하는 중심 취락으로 성장하였음이 짐작된다. 다음 송국리유적의 학술적 의미와 가치에 대해서는 크게 세 가지 범주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첫 번째로 송국리유적의 발굴 및 보고는 송국리유형과 송국리문화를 설정케 한 기초 자료의 최초 제공이라는 측면에서 학사적으로 의미가 크다. 하지만 최초만을 지나치게 강조하기보다는 다른 유적에서 찾아 볼 수 없는 유일무이한 특성을 더욱 부각시키는 편이 바람직하다. 다음 두 번째로는 완전한 형태를 갖춘 대단위 취락으로서의 자료적 가치를 들 수 있다. 송국리유적은 점유 기간이 청동기시대 중기라는 시간 범위를 벗어나지 않기 때문에, 특정 시기의 취락 구성 원리나 해당 기간 내에서의 변화 과정을 살피는 데에 양호한 자료를 제공한다. 마지막 세 번째는 조사할 부분이 많이 남아있다는 측면에서의 학술적 발전 가능성에서 그 가치를 찾을 수 있다. 조사 기법의 발전과 더불어 앞으로 훨씬 더 다양하고 많은 정보가 획득될 것이 분명한데, 이것이 다른 유적과 비교할 수 없는 송국리유적의 가장 큰 학술적 가치라고 생각한다.
이 글은 부여 송국리유적에서 조사된 청동기시대 석관묘의 주요 특징과 기능 및 성격에 관한 문제를 재검토한 것으로서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주변지역의 사례와 비교되는 송국리유적 석관묘의 특수성은 대형화된 묘실 개석과 매장주체부, 그리고 벽석부의 보축시설 및 부장품의 문화적 상이성 등으로 요약된다. 둘째, 동검 부장묘로서의 1호 석관묘와 묘역내 중심적 입지에 자리한 5호묘간의 어색한 배치관계에 미뤄 볼 때, 그간 묘역내 중심묘적 기능을 가진 것으로 인식되어온 송국리 1호 석관묘의 시간성과 성격문제는 재고될 필요가 있다. 셋째, 송국리 5호 석관묘는, 유구 자체의 제반 특징과 주변 지역 유사 사례 등을 종합적으로 비교한 결과 고인돌적 특성이 강한 것으로 판단하였다. 아울러 5호묘(추정 고인돌) 출토 이중구연 단사 선문토기를 시간성의 문제가 아닌 문화 성격적 측면에 보다 집중할 경우, 그것을 축조한 사람들의 성격을 이해하기가 한결 수월해진다. 넷째, 묘역의 형성과정은 구릉 정상부 방대상의 돌출부 중심에 자리한 5호묘와 그 서북쪽 4호 석관묘 및 미조사된 6호 석관묘 등의 관계가 성립된 이후(先), 중심묘적 기능을 가진 5호묘의 축선을 기준 삼아 1호 석관묘 및 그 사이의 2·3호 석개토광묘가 들어서면서 (후), 최종적으로 하나의 성토부가 구획되어 묘역화 되었을 것으로 본다. 다섯째, 송국리문화권내에서 고인돌적 전통이 수용되는 과정에는 송국리집단의 주도적 역할이 예상된다. 아마도 고인돌문화 속에 내재된 신앙과 의례풍습 등을 존중해주는 한편 서로 공유함으로써 두 집단간의 정신문화적 측면에서의 동화를 모색한 듯하다. 결론적으로 송국리 1호 석관묘와 5호묘의 관계는 고인돌 축조집단의 신앙체계나 문화적 관습 등을 수용한 송국리집단의 배려로 볼 수 있을 듯하다.
고창지역은 지석묘 중심 분포권으로 한반도에서 지석묘 최대 밀집지역 가운데 하나로 일찍부터 지석묘에 대한 관심과 함께 지속적인 연구가 이루어졌다. 고창지역 청동기시대는 금강유역에서 형성된 송국리문화가 만경강-동진강을 거쳐 고창지역으로 들어오면서 지석묘문화와 송국리문화가 결합되어 청동기문화를 꽃피웠던 지역이다. 고창지역을 지형적 특징에 따라 갈곡천유역권, 주진천유역권, 서부 해안지역권, 대산천‧와탄천유역권 등 크게 4개의 권역으로 구분 하여 각 유역권에서 조사된 고고학 자료를 살펴보았다. 지금까지 고고학 자료를 살펴보면 고창지역은 조‧전기유적 부재와 중기유적의 급증으로 고창지역만의 지역성이 두드러지는 것이 특징이다. 송국리문화의 확산으로 취락에 있어 송국리 식주거지가 급속하게 증가하고 있으며 분묘는 재지의 지석묘가 중심을 이루면서 일부 송국리문화의 영향으로 볼 수 있는 석관묘, 석개토광묘, 옹관묘 등이 축조되기 시작한다. 주거에 있어 송국리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지만, 분묘에 있어서는 전통성과 재지성이 강한 지석묘를 축조하면서 하부구조인 매장시설은 석관을 채용하고 있다. 이는 지석묘 축조 집단에 의해 주거와 분묘의 요소 일부를 송국리 문화를 채용하면서 나타나는 현상으로 볼 수 있다. 후기가 되면 새로운 점토대토기문화가 유입되면서 기존 지석묘는 물론 송국리문화도 급격하게 쇠퇴한다. 점토대토기문화는 취락의 부재와 분묘 또한 산발적으로 나타나고 있어 주류문화로 형성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청동기시대부터 고창지역은 지석묘를 통한 독자적인 문화권을 형성하며 이후 지석묘사회의 점진적인 변화과정을 거쳐 마한사회로 변화된다.
한국의 청동무기 연구는 尹武炳의 청동단검 형식분류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동북아지역의 청동무기 중 한국에서 출토되는 동검의 특징적인 마연 현상을 찾아낸 것이다. 이후 이를 기반으로 세밀한 연구가 다양하게 진행되었는 바 아직까지 이보다 先見을 가진 형식분류가 나오지 못한 것은 그의 완성도 높은 논문에 따른 것으로 생각된다. 다시 말해 그의 청동무기 형식분류는 현재에도 생명력을 잃지 않고 있으며 지속적으로 활용되고 있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겠다. 다만 尹武炳의 청동무기 형식분류는 공반품의 검토에서 오류가 발생하는데 필자는 선생의 연구를 기반으로 재분류를 진행하였다. 즉 동검 Ⅰ식과 Ⅱ식 마연의 세부적인 분류를 진행하고, 공반품을 통해 각각의 공존기간을 살펴보았다. 이와 함께 요령식-한국식동과의 계보 문제(단절), 중세형 청동무 기의 제작지(국산화)에 대한 견해를 간략히 제시하였다. 이는 1960년부터 2020년까지 청동무기 연구사와 출토 사례를 기반에 둔 분류·분석의 결과로 생각되는 바이다. 이상을 토대로 앞으로의 연구 방향을 생각해본다면, 형식분류의 확대보다 선학의 연구사를 받아들이고, 치밀한 관찰을 통해 한국고고학에서 밝혀내지 못한 점을 특정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나아가 고고학 연구는 다양한 방향 모색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서는 다각화된 쟁점 및 학제 간 협동 연구가 필수적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