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실학자의 일본인식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선행연구가 있지 만 조선통신사의 일본 왕래가 저조해진 19세기에 활약한 실학자에 대한 그것은 비교적 양이 적은 것으로 보인다. 본고에서는 그 중에서 최한기 (崔漢綺)와 이규경 (李圭景)의 일본인식에 초점을 맞춰서 살펴보았다. 최한기의 일본관은 세계 각국의 지리, 제도, 산물, 역사, 종교, 풍토, 문화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지구전요 (地毬典要)에 집중적으로 나 타나 있다. 그 저본은 세계지리서인 『해국도지 (海國圖志)』와 『영환지략 (瀛環志略)』이지만 두 책의 일본 기술이 미비한 부분을 신유한 (申維翰) 의 『해유록 (海游錄)에 의거해서 보충했기 때문에 그의 일본에 관한 지 식・이해는 신유한에 의거하고 있다. 최한기는 일본의 세습제도에 대해 “어찌 인간의 재능에 한계가 있겠 는가? 실로 정교 (政敎)의 구속에 의한 것이다”라고 비판하기도 했지만 대체적으로 냉정하고 공평하게 기술하고 있다. 그의 일본 정보・지식은 상대적으로 한정되어 있었으나 ‘기학 (氣學)’이라는 새로운 사상체계를 구축함으로써 전통적 유교의 화의사상이나 역사적인 적개심, 멸시관도 극복할 수 있었다. 한편 이규경은 규장각검서관 (奎章閣檢書官)이자 『청령국지 (蜻蛉國 志)라는 일본에 관한 저술도 있는 실학자 이덕무 (李德懋)가 할아버지 였으므로 일본에 대해서는 최한기보다 풍부한 문헌과 지식・정보와 접 할 수 있었다. 그는 실제로 그것을 활용해서 일본의 신화, 역사부터 생활 문화와 속신 (俗信)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지식을 그의 저서 오주연문 장전산고 (五洲衍文長箋散稿) 속에서 기술,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이규경은 일본인을 가리켜 ‘도이 (島夷)’, ‘왜이 (倭夷)’, ‘흑치 녹정 (黑齒綠頂)’ 등의 멸칭을 거리낌 없이 쓰고 그 방대한 지식을 가지 고도 일본이나 일본인에의 멸시관, 차별의식을 고치고 극복하기에 이르 지 않았음을 알 수 있으나 사고전서 (四庫全書)에도 수록된 일본의 유학 자 야먀노이 테이 (山井鼎)의 『칠경맹자고문 (七經孟子考文)』의 고증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듯이 이규경은 그러한 차별의식을 옆에 두고 일본의 문물이나 학술의 좋은 것을 평가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본 연구는 조선후기 실학의 한 양상을 보여준다고 평가되는 五洲衍文長箋散稿의 구성상의 특징을 살피고, 이와 관련하여 五洲 李圭景(1788-1856)의 공부법 가운데 하나를 밝힘으로써 조선후기 일부 지식인들에게 보이던 지적 풍토를 究明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 과정에서 다음 사항들이 검토되었다.첫째, 기존에 알려진 五洲의 작품 五洲衍文長箋散稿 五洲書種 詩家點燈 이외에 五洲의 손에서 이루어진 다른 서적이 있는가를 검토하였다. 五洲衍文長箋散稿에 대한 분석만으로도 이상 3종 이외에 약 20여종의 서적이 五洲의 저작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둘째, 그렇다면 이 많은 저작들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어째서인가? 이는 무엇보다 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 보이는 構成上의 문제를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 즉, 이 책은 일정한 주제에 관해 沈潛된 사고를 바탕으로 저자의 견해를 피력하는 데에 주안을 두었다기보다는, 일정한 주제에 관해 기존의 관련정보들을 갈무리해두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다시 말해, 짧은 기간에 많은 저작을 남긴 것은 오히려 깊이 있는 沈潛이 결여된 成冊 방식이 큰 몫을 한 듯 하다. 셋째, 정보를 갈무리하는 성책방식은 단순한 독서를 통해 이루어진다기보다는 해당 정보를 직접 ‘보유’하고 있을 필요가 있다. 이 과정에서 크게 활용된 공부법이 바로 抄였으며, 抄는 抄하는 과정에서 정보의 습득을 가져오지만 또 다른 측면으로 보자면 정보의 구축, 즉 성책의 수단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五洲衍文長箋散稿라는 책은 五洲가 지녔던 癖에 가까운 抄라는 공부법이 이루어낸 결과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