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2015년은 헨리 게어할드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 1858-1902)의 한국선교 130주년이 되는 해이다. 한국에서 그의 활동은 당시 다른 선교사들과 비교해 볼 때(예를 들어 언더우드의 31년 사역, 1885-1916) 비록 17년(1885-1902)이라는 짧은 기간동안에 이루어졌지만, 아펜젤러는 한국감리교회의 주춧돌을 놓았을뿐만 아니라 한국 개신교의 발전과 한국 근대화를 위해 크게 기여하였다.
이 글에서 필자는 아펜젤러의 삶과 사역을 주로 다루었는데, 그의생애는 두 개의 특성으로, 그리고 그의 사역은 총 일곱 개의 특성들로설명하였다. 우선 아펜젤러는 중생을 경험한 후 감리교인이 되었고,그의 아버지는 아펜젤러가 장로교 목사가 되기를 원했지만 그는 감리교선교사가 되었다.
한편, 아펜젤러는 초기 한국에 온 개신교 선교사들 중의 한사람으로서 선교 초기 미국과 한국 정부의 조언을 수용했던 착한 사람이었다.아펜젤러는 쌀(rice) 혹은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이 아닌 진정한 기독교인을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사역했다. 물론 여전히 논쟁적이기는 하지만, 아펜젤러는 한국에서 교회를 세운 초기 설립자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또한 그는 한국의 근대화와 기독교 교육의 발전을 위해 공헌했던교육가였을 뿐만 아니라, 당시 한국에 거주하던 선교사들을 포함 대부분의 외국인들을 이끌었던 유능한 지도자이기도 했다. 마지막으로중요한 점은 아펜젤러가 계몽운동가와 독립운동가로서 한국의 근대화,민주화, 그리고 독립을 위해 기여했다는 점이다.
요컨대, 아펜젤러는 영적인 회심을 경험했던 진정한 기독교인이었다. 그리고 당시 외국인들, 한국인들과 사회적으로 좋은 관계를 맺고있었던 착한 사람이었다. 게다가 그는 수용과 저항의 때를 분별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즉 그는 한국 사람들이 복음을 들을만한 준비가 될 때까지 미국과 한국 정부의 지시를 받아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미국이 일본과 같은 강대국들의 한국 점령을 암묵적으로 허락하거나 고종이 근대민주국가로의 변화에 대해 거부했을 때는 미국과 한국정부에 당당히 저항하였다. 그러므로 아펜젤러의 한국선교 130주년을 기념할 때, 한국의 모든 개신교회들은 반드시 그의 열정적인 영성,따뜻한 사회성, 냉철한 분별력에 관해 반드시 재고해야만 한다.
한국 개신교 선교는 공식적으로 1885년 미국 선교사 아펜젤러와 언더우드가 제물포를 통해 한국에 들어오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그 이후 일본의 박해와 한국전쟁의 비극이 있었지만, 그 와중에도 한국교회는 놀라운 성장을 이룩하였다. 특히 한국 감리교회는 미국 선교사 헨리 아펜젤러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 그는 1885년부터 1902년까지 한국에서 사역하는 동안 진정한 선교사, 전도자, 목사, 행정가, 교육가, 개척자, 학자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한국 최초의 서양교육기관인 배재학당을 세웠고, 신약성경을 한국어로 변역했으며, 러시아, 중국, 일본의 압제 속에서 한국을 적극적으로 변호했고, 최초의 한국어 개신교 신문을 발행했다. 또한 개인의 영혼구원뿐 아니라 한국사회 에 진정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선교사를 ‘그리스도 의 군사’로 이해했으며, 그리스도의 군사는 무력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방민족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해야 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리고 최후의 승리가 그리스도께 있음을 확신했다. 그는 감리교 선교사였지만 모든 개신교단들이 한국의 복음화를 위해서 연합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그것을 실천하려고 애썼다. 그것은 특히 성경번 역사업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그가 정치부패, 제국주의의 침략, 가난 같은 사회악에 단호히 대처했지만, 그 시대의 다른 서양 선교사들이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문화제국주의적 성향과 전통종교에 대한 이해 의 부족, 그리고 그로인한 타종교에 대한 전투적인 태도가 약점으로 지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선교적 노력은 한국의 독립, 민주주의 와 근대교육의 발전, 그리고 성경번역과 보급에 크게 공헌했다고 할 수 있다. 본 논문은 먼저 선교사로서의 아펜젤러가 등장하기까지의 개인적 배경을 간략하게 서술하고, Daniel Davies의 구분에 따라 아펜젤러가 한국에서 사역한 17년을 여섯 기간으로 나누어 각 기간의 특징들을 서술한다. 그런 후, 아펜젤러의 선교이해와 그의 한국선교를 통해 드러난 선교학적 공헌과 약점을 정리하고 있다.
본 논문은 아펜젤러의 일기인 자유와 빛을 주소서, 필라델피아 전도 자모임 연설문인 “한국: 우리의 사역과 기회의 현장”, H. G. 아펜젤러의 보고서, “설교집”, 그리고 사적인 기도문 등을 통하여 그의 교육선교를 고 찰하려는 데 목적을 둔다. 이 연구에서는 이 문헌들을 분석함으로써 아펜 젤러의 교육선교 정신과 구령사역(救靈使役)의 열정을 고찰할 것이다. 미국감리교선교회 소속 선교사 아펜젤러는 1885년 4월 5일에 제물포항 에 입항했다. 그러나 전도사역을 금하는 조선의 엄격한 국법 때문에 1885 년 내한한 이래로 복음전파를 통한 직접적인 전도방법을 모색하지 않았으 며, 대신 교육선교에 최선을 다해 투신했다. 아펜젤러가 자신의 교육선교 사역을 기반으로 보여준 중요한 논점들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그의 교육선교 사역 정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진실한 신앙고 백과 교육을 통해 복음을 전파하려는 순수한 열정 위에 전개되었다. 둘째, 그가 교육선교 사역에 임하게 된 동기는 다양했다. 그는 기독교를 불교와 유교, 샤머니즘과는 본질적으로 차원이 다른 종교로 소개했으며, 복음에 입각하여 교육선교 사역을 수행함으로써 비기독교적인 윤리와 전 통들을 일소(一掃)하고자 했다. 셋째, 교육선교 방안을 깊이 숙고하여 매서인 공동체, 일본인 성경공부반, 벧엘예배소, 주일학교, 감리교 교리연구반, 속회활동, 신학반, 금요공부, 매일학교, 속회 등을 운영함으로써 다양한 체제의 교육을 실천했다. 넷째, 그는 소수의 소년들로 시작하여 유능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취 지로 배재학당을 설립했으며 교육선교 사역을 기반으로 정동제일교회를 건립했다. 또한 초기의 여러 기독교서적들을 저술함으로써 문서선교를 확 립하는 일에 지대한 공헌을 남겼다. 그가 남긴 이러한 공적들은 교육선교 와 실천을 바탕으로 결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