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su(Beacon Fire Station) is a facility that sends signals with fire and smoke and has been used in Korea since the Three Kingdoms period. This facility was installed to know the north and south crises. This trend continues until the Joseon Dynasty, and it has been somewhat completed in the 17th century. In previous studies, beacon fire was identified mainly from the border area to Hanyang. Based on this, it was classified into Gyeongbongsu, Yeonbyeonbongsu, and Naejibongsu. However, it is difficult to define the characteristics of beacon fire in coastal areas only with this classification. In the case of beacon fire in island areas, there was a tendency to value communication connection within the region rather than connection with the capital. As a case analysis for this, an academic review was conducted with the cases of Ganghwa Island and Jeju Island. As a result, it was confirmed that the role and character of the beacon vary depending on the defense system and the physical distance from the land, even if it has the topographical commonality of the same island.
영동지역의 烽燧에 대한 기록은『朝鮮王朝實錄』과 『世宗實錄地理志』 이후의 각종 지리지 등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운영되는 과정에서 그 명칭이나 위치 이동, 봉수 수에서 별다른 변동없이 이어져왔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구체적으로 강원도 해안지역의 봉수는 동해안에서 間烽인 통천의 金幱城烽燧에 서 제 1거 直烽인 회양의 所山烽燧와 2거인 영덕 大所山烽燧에서 안동의 烽枝山 烽燧로 연결되는 총 38개 정도의 間烽과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제 1거에 연결될 수도 있고, 2거에 연결될 수도 있는 間烽으로 볼 수 있으며, 그 형태와 기능면에 서 연변봉수로 볼 수 있다. 신라대에 설치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실제 유물이나 유적으로 확인 할 수는 없으므로 조선 건국 초에 왜구와 여진족을 막기 위해 전국적으로 봉수제를 정비 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다. 봉수의 폐지 시기는 임진왜란 이후 이 지역에 왜구의 피해가 거의 없었고, 북변에 있는 여진족[만주족]이 이 지역까지 침입하지는 않았다는 사실과 『척주선생안』에 기록된 三陟府使 柳時會의 재임 중인 丙寅年(1626)에 영동지방의 烽臺를 폐지하였다는 기록, 그리고 『여지도서』에 삼척의 봉수는 폐지되었다고 한 기록 등을 종합해보면 인조 丙寅年(1626)에서 『輿地圖書』가 편찬된 18세기 중엽 사이에 폐지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삼척지역의 봉수에 대한 현지 조사 결과 해발 100m 내외의 바다가 바라보이는 산봉우리나 곶에 위치하였고, 연소실이 하나인 단봉이었다. 연소실은 가곡산봉수에서만 방형의 연소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연대 형태는 양야산봉수가 방형이고, 나머지는 원형으로서 축조 재료는 석축이 주조를 이루었고, 임원산봉수만 토-석 혼축이었다. 연대의 평면 형태에서 초곡산봉수와 가곡산봉수는 연대형이고, 양야산봉수와 임원산봉수는 연대 방호벽형, 광진산봉수는 연대 호형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건물지 배치 형식에서 광진산봉수와 초곡산봉수는 연대 단독형이고, 양야산봉수·임원산봉수·가곡산봉수는 창고지나 추정 창고지가 있기에 일곽형으로 볼 수 있었다. 규모로 보았을 때 삼척지역의 봉수는 다른 지역과 비교하여 연대 크기는 보통이나 방호벽이나 호는 작은 편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광진산봉수의 호가 반원형이라는 점, 임원산봉수에서 창고지가 발견되었는데, 건물 축대가 6단 정도로 잘 남아 있다는 점과 반원형인 연대 방호벽형의 형태를 띠고 있다는 점, 그리고 가곡산봉수에서 비치물품 중의 하나였던 수마석이 발견되고, 건물지로 추정되는 곳이 있다는 점과 전체적으로 초곡산봉수를 제외하고 그 형태가 비교적 잘 남 아 있다는 점에서 삼척지역의 봉수는 동해안 지역의 연변봉수를 연구하고 분석하는데 있어서 많은 시사점을 제공할 수 있다. 그리고 후망의 설치는 봉수제도를 보완하기 위하여 설치하였을 수 있고, 백성들 의 부담을 줄여주거나, 봉수제 폐지 이후 해안 경계를 위한 후속 조처로서 설치하였을 수도 있음을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