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고는 촉석루 제영시의 역사적 전개와 작품의 내적 특징을 살펴보는데 목적이 있다. 전통의 재인식과 창조적 계승이라는 측면에서 시문의 총량 파악은 무엇보다 절실하며, 제영시에 반영된 다양한 주제의식을 도출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방대한 문헌을 두루 뒤져 촉석루 제영시 전모를 가늠할 수 있었다. 이 집성 자료를 바탕으로 작가층의 성격, 작품의 형식과 내용적 특성을 검토한 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촉석루 제영시의 작가는 710명, 작품 수는 884제 1,028수에 달했다. 이는 잠정적이기는 하나 현재까지 전국의 단일 누정으로서는 최다 수준이다. 그리고 작가는 경남 출신이 가장 많아 전체 49%를 넘고, 그중에서도 진주를 비롯해 서부 경남 출신이 약 87%를 차지했다. 또 작가는 유람객이 제일 많고, 고을 통치와 관련된 관리들의 작품도 적지 않았다. 작가들 중에는 스승과 제자, 혈연관계가 있는 문인들이 많은 점도 특징이다. 둘째, 창작 시기를 알 수 있는 작품은 893수로 전체 약 87%에 달했다. 이중 임진왜란 이전의 작품은 133수로 비교적 적은 분포를 보였다. 작품의 약 33%인 335수가 1900년 이후에 창작되었는데, 이는 19세기 후반 이후로 출생한 경남지역 문인들의 작품이 대거 양산된 결과였다. 셋째, 촉석루 시 중 7언시가 93%로 압도적인 비율을 보였다. 그중에서도 7언율시가 약 75%에 달해 대표적인 양식으로 향유되었음을 알았다. 이는 원운의 권위를 활용하는 제영시의 일반적 창작 경향에서 비롯 된 것으로, 선편을 잡은 정을보의 시는 조선전기까지만 원운으로서 기능했다. 조선후기에는 신유한의 시를 차운한 이가 40%일 정도로 거대한 흐름을 이루었다. 또한 임란 사적과 유관한 시어가 관습적으로 활용 되었는데, 이는 다른 누정시와 분명히 구별되는 지점이라 하겠다. 넷째, 촉석루 시의 주제는 진주의 문화경관에 대한 상찬, 임진왜란의 대응과 구국 의지, 순국 영웅의 기억과 내면 성찰, 유람의 진정성과 시대의식의 네 가지로 유형화할 수 있었다. 조선후기 이후로는 순국 영웅을 호출해 내면을 성찰하거나 강개한 충의 정신을 주제로 내세우는 창작 경향이 지배했다. 이에 따라 빼어난 경관만을 부각하는 시는 자취를 거의 감추었고, 촉석루 유람이나 작시 행위를 올바른 시대의식을 체득하는 계기로 삼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일제강점기의 반민족적 유람 풍조를 시를 통해 준열히 비판하기도 했다. 촉석루 제영시를 대상으로 진행한 통시적이고도 실증적인 본 연구가 누정문학의 특성을 구명함은 물론 지역문학사를 다양하게 구성하고, 나아가 한국문학사를 기술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기대한다.
이 글은 임진년(1592) 오월 진주성 촉석루에서 김성일, 조종도, 이로(혹은 곽재우)가 남강에 투신하여 죽음을 결행하려 했던 사건과 관련되어 지어진 시에 관해 언급한 여러 기록에 대해 고찰한 것이다. 삼장사에 관한 사적을 기록한 글로는 「從遊諸賢錄」(성여신 찬), 「鶴峯言行錄」(최현 찬), 「矗石樓詩懸板」(오숙 찬), 「大笑軒事蹟畧閭表碑」(찬자 미상), 「矗石樓詩註」(김응조 찬), 「大笑軒行狀」(한몽삼 찬), 「請祠祀三壯士疏」(하세응 찬), 「鶴峯年譜」(이재 찬), 「松巖李先生行狀」(조선적 찬) 정도가 『용사일기』가 印刊되기 이전의 기록으로 살펴진다. 이들 자료에는 대부분 삼장사시의 지은이를 김성일로 기록하고 있으나, 시의 작자를 다른 사람인 것으로 기술한 경우도 있고, 남강에 투신하여 죽음을 결행하려 했던 사실을 언급하면서도 시를 지었다는 사실에 대한 기록은 나타나지 않는 것도 있다.
1762년 간행된 이로의 『용사일기』는 동일 저자가 지은 「문수지」와는 달리 삼장사시의 작자가 김성일이고, 그와 함께 당시 현장에 있었던 인물을 조종도와 이로로 기술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로 사후 백수십 년이 지난 뒤 이 책이 출간된 배경에는 삼장사 사당의 건립과 관련해서 현실적인 이해 관계가 문중 간에 얽혀 있었다. 인간된 『용사일기』는 이로가 찬한 원래의 초본에 적지않은 첨삭이 가해졌기에 출간 당시부터 문제가 되었으나, 『용사일기』의 출간에 뒤이어 한몽삼의 글이 수록된 『대소헌문집』이 간행되어 이-삼장사설을 뒷받침하였고, 비슷한 시기에 현풍 곽문에서는 『망우집』을 중간하여 곽-삼장사설을 주장하게 되면서 이후 양측의 주장이 심각히 대립하였다.
『망우집』의 발간으로 점화된 삼장사 시비에 관여하여 가장 정밀한 수준에서 이-삼장사설이 옳음을 논증적으로 밝힌 이는 대산 이상정이었다. 이상정이 찬한 『촉석루시사적』은 학봉이 초유사로 함양에 도임한 때로부터 이후 진주성에서 촉석루시를 짓기까지 『용사일기』의 기록을 위주로 김성일, 조종도, 이로, 곽재우 4인의 행적을 발췌해서 정리하고, 이에 대해 이상정 자신의 견해를 제시하여 이-삼장사설이 옳음을 논증한 내용이다. 이상정은 무엇보다도 촉석루시의 작성 시점이 조종도가 의령에서 돌아온 직후라는 사실에 주목하여, 조종도가 의령에서 돌아왔을 때 곽재우는 이미 진주를 떠나 의령으로 돌아와 있었으며, 대신에 이로가 진주에 있었다는 사실을 논증하였다.
『촉석루시사적』의 간행 이후 촉석루 삼장사에 관해서는 이-삼장사설이 통설의 지위를 차지한 듯이 보인다. 이후에도 삼장사 사적에 관한 이견(異見)이 간간히 표출되었으나 마침내 근년에 진주성에 삼장사 비를 세우면서 이-삼장사설의 내용이 ‘촉석루중삼장사기실비’의 비면에 새겨지게 되었다. 이로써 촉석루 삼장사시는 김성일이 지었고, 당시 시를 짓는 현장에는 조종도와 이로가 함께 있었다는 것이 실효적 사실로 자리잡아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