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조선중기의 임진왜란 초기에 경상우도의 의병 봉기에 크게 기여하고, 정유재란을 당하여 고립된 황석산성에서 전직 군수로서의 직분을 지켜 순절하였던 대소헌 조종도가 한국의 인물사 내지 문화사에 있어서 가지는 의의를 점검하고, 역사 문화 인물로서 대소헌 조종도의 위상을 역대 문헌에 수록된 그 인물 형상의 특징을 통하여 개괄하고자 집필되었다.
본론에서는 먼저 대소헌과 관련된 문헌을 사망 직후의 애도를 표한 輓章과 祭文, 친지나 가문 기록으로서의 碑誌와 傳狀, 국가나 사림의 공식 추모 문자로서의 褒贈 追崇의 문자 등 세 층위로 나누어, 해당 인물에 대한 사적 애도와 공적 추모의 전개 양상을 점검하고, 다음으로 이들 문헌에 빈번하게 나타내는 인물 형상의 특징적인 징표를 大笑子와 烈丈夫라는 두 가지 개념으로 요약하고, 그 인물 형상의 성립 정착 과정을 추적하는 한편, 이 두가지 징표가 가지는 인물사적 문화사적 의의를 간략하게 추론하였다.
결론에서는 대소헌 조종도가 남명 조식의 문도로서 학문을 성취하여 통달한 식견과 활달한 처신 및 왜란 도중 의병을 일으켜 국난에 헌신하고 황석산성에서 대의를 지켜 죽음을 감수한 행적으로 인하여, 그와 교유한 당대의 지인들은 물론 후대 사대부 지식인으로부터 대대로 추숭되고, 조정과 사림으로부터 누차 포증을 받아, 조선왕조의 역사에 있어서 유가 의리와 신념에 충실하여 죽음을 사양치 않은 인물 전형의 하나로 각인되었다고 논평하였다.
大笑軒 趙宗道(1537-1597)는 丁酉再亂 때 黃石山城에서 장렬하게 일생을 마쳤던 분이다. 당시 그 황석산성에서는 대소헌 이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그런데도 그곳에서 죽은 사람으로 大笑軒과 存齋 郭䞭(1551-1597)만 자주 거론되는 것은 이들이 단순히 縣監이란 벼슬아치였기 때문은 아니다. 이들의 행위는 그 자체로도 기릴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었던 것이며, 또한 이들이 황석산성에서 殉死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길이 추앙을 받을 수 있었던, 학문과 행실을 겸비했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대소헌의 생애를 살펴보고, 이를 바탕으로 하여 그의 학문과 삶의 태도에 대해서 고찰한 결과, 대체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점에서는 합의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첫째, 대소헌은 총명한 두뇌를 타고난데다, 鄭斗·盧禛·曺植 등 당대 경상우도에서 가장 이름난 스승으로부터 학문을 사사하였고, 이러한 학문 풍토에서 함께 강학했던 좋은 벗들을 많이 만나, 여기서 학문이 무르익을 수 있었다.
둘째, 「學校策」이나 「倡義文」 등을 통해서, 대소헌의 학문이 社會的 實踐과 깊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었고, 이는 바로 曺植의 학문과 깊은 영향관계에 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었다.
셋째, 대소헌은 대범하고 호방한 삶의 자세를 지녔는데, 학문에 의해 ‘大節이 不踰閑’할 수 있었기에 후인의 추앙을 받을 수 있었다. 황석산성에서 장렬하게 최후를 맞을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런 삶의 자세와 학문의 역량에 의해서 가능할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