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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0.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지역 문화와 영남 무용은 모두 지리적 환경과 자연 조건을 토대로 장기간에 걸쳐 형성된 산물이며, 본 연구는 먼저 지역 문화와 영남 창의 무용의 상호 의존 관계를 명확히 살펴본다. 그 다음 영남 창의 무용에서 영남 지역 문화의 역할과 생성 방식을 고찰하며, 이를 토대로 지역 문화가 담긴 영남 창의 무 용의 형태 특징을 도출하고 요약한다. 마지막으로 영남 무용에 대한 지역 문화의 의미를 분석하고 이를 통해 양자의 공동 발전을 촉진할 수 있는 관련 의견을 제 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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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4.06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이 글은 정재가 지닌 융합적 성격을 고려하면서, 정재의 의미에 접근하는 연구가 필요하다는 문제 제기를 하며 시작되었다. 특히 정도전은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사상가이자, 그가 지은 악장은 조선시대에 표본적 역할 을 했으며, 이후 정재의 형태로 공연되어 대한제국까지 지속되었기에 그의 악장 정재를 연구대상으로 삼았다. 정도전은 1393년(태조 2) 7월에 태조에게 악장을 지어 올렸는데 그 중 <몽금척>․<수보록>․<문덕곡>이 나중에 정재의 형태로 확장되었다. 따라서 이 글의 목적은 정도전 악장의 정재인 <몽금척>․<수보록>․<문 덕곡>의 가무악 요소에 담긴 상징과 비유는 무엇가? 그 상징이 어떻게 조선시대에 지속되었으며, 현재적 의미 는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려는 것이다. 연구의 시기적 범위는 조선시대로 한정하며, 대한제국기를 포함한다. 연구방법은 정재가 기록된 사료와 도상자료를 중심으로 연구하는 문헌연구방법을 택했다. <몽금척> 정재는 태조가 즉위 이전에 꿈에 신인이 내려와 천명을 상징하는 ‘금척’을 주었다는 내용이다. ‘금척’은 곧 ‘금으로 만든 자’인데, 신화에서 자[尺]는 왕권과 함께 생명력과 규범을 상징한다. 치어의 내용에 서 금척을 받을 인물의 조건은 문무를 겸하고, 덕이 있으며, 지식을 모두 갖추고 있고, 백성들이 바라는 사람 이었다. 1인이 읊는 치어가 하늘 뜻을 대표한 것이라면, 12명의 함께 노래하는 창사는 많은 백성들의 뜻이라 는 것을 시각화해서 상징적으로 드러냈다. 금척사에서는 ‘유덕’과, ‘백성들의 마음’을 강조했다. 창사를 부르면 서 점진적으로 춤도 확대되는데, 천 억대를 이어가라는 금척사의 메시지의 확대와도 상응하였다. 마지막 퇴구 호에서는 경계의 마음을 가지라고 당부한다. <수보록> 정재는 태조가 즉위 이전에 이상한 글이 쓰여 있는 ‘이서’를 지리산의 석벽에서 사람이 얻었는데, 이후에 태조가 즉위하여 이 글이 실현되었다는 내용이다. <수보록>의 춤에서 핵심적인 상징은 ‘보록’이라는 무구이다. ‘금척’이 하늘에서 천명으로 신인이 내린 것이라면, ‘보록’은 살아있는 사람이 전해준 것이나, 왕업 이라는 상징은 상통한다. 춤에서 상징적인 인물은 지선(地仙)인데, <수보록> 악장에 없던 새로운 역할로 등장 했다. 보록사를 창한 뒤에 전체 6대의 18인의 무원이 이중으로 줄지어 세 차례 도는 춤동작은 창사의 내용이 모두 이루어지라는 온 백성의 염원과 소망을 담은 듯하다. <문덕곡> 정재에서는 백성들의 염원을 상징적으로 드러냈다. <문덕곡> 악장은 태조 이성계가 언로(言路) 를 열고, 공신(功臣)을 보전하고, 토지제도를 개혁하고, 예악을 정리한 것을 치적으로 찬양한 내용이다. 표면 적으로는 공덕을 기리는 것이지만, 내면적으로는 정도전이 건의하여 진행 중인 네 가지 사안이 앞으로 조선왕 실에서 지속되기를 바라는 기원이었다. 태조대에 만들어진 세 악장은 늦어도 태종대에 정재로 만들어져서 각종 의례에 쓰였다. 태종대에는 <몽금 척>과 <수보록>의 내용이 꿈에 일어난 일과 도참설일 뿐 태조의 실제 덕이 아니라고 비판받았으나 세종대는 다시 <몽금척>과 <수보록>을 활발히 공연했다. 그러나 조선후기에는 <몽금척>만이 연향에서 자주 공연되었 으며, 대한제국 때까지 지속되었다. 정도전 악장의 정재는 신하로서 임금에게 하는 발언이자 제언이기도 했다. 공연 중간에 부르는 악장을 단순 히 임금의 공덕이나 치적을 받들어 올리는 송덕이나 장수를 기원하는 내용으로만 이해하면 평면적인 이해에 그치는 것이다. 오히려 정도전이 악장에서 강조하는 것은 위정자로서 칭송받을 만한 공덕을 지니고 있어야 한 다는 ‘경계’의 시각과, 천명과 민심에 의한 정치를 해야 한다는 메시지가 낮고 무겁게 깔려 있다. 정도전의 민 본사상이 그의 세 악장 정재에서도 고스란히 나타난 것이다. 정도전의 악장에서는 민심을 반영하는 좋은 국가 를 만들기 위해 군주로서의 최선이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고민하도록 했다. 천심, 즉 민심을 떠난 왕과 왕실은 결국 망할 수밖에 없다는 이러한 메시지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최고국정자의 리더십이 어떠해야 하 는가? 국가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고민해야 하는 오늘날에도 정도전의 악장 정재가 주는 ‘묵직한 울림’은 여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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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12.06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본 연구는 한국무용사에 있어 고대와 근대 사이를 잇는 고려시대 원구(圓丘)제천의례를 연구 대상으로 삼아 의례에 연희되는 춤을 고찰 하고자 한다. 성종 2년 처음으로 시행된 원구제천의례는 제천(祭天)·기곡(祈穀)·우사(雨祀)의 성격을 지닌 농경제의로 고려의 가장 중요한 국가제사 중 하나이다. 정규적으로 1년에 2회 정도 정월과 맹하 (孟夏)에 거행되었으며 한발(旱魃)과 같은 특수한 경우에는 임시로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이후 선종 때 다시 예제를 정비하면서 송의 예제와 함께 춤과 음악 등이 수용되었다. 원구제의 제례 진행시 추는 춤이 일무(佾舞)이다. 일무는 아악의 대표적인 무악이다. 고려에서 는 6열 6행으로 구성된 36인의 육일무로 문무는 약(籥)과 적(翟)을 들고, 무무는 간(干: 방패)과 과 (戈: 창)를 들고 춤을 추었다. 이후 의종 대에는 36인이 추는 육일무에서 48인이 추는 육일무로 변경되면서 문무를 인솔하는 무원(引文舞)의 무구(舞具)가 바뀌었다. 36인으로 구성된 육일무의 무구가 간(干)과 과(戈)라면 48인으로 구성된 육일무의 무구는 간(干)과 척(戚)으로 창을 대신하여 도끼(칼)를 들고 춤을 추었다. 일무에 사용되는 음악이 대성악(아악)과 우리의 전통궁중음악인 속 악(향악)이다. 일무에 사용되는 대성악은 송의 궁가를 헌가로 축소 편성한 아악이며 속악은 원래 송의 대성악이 수용되기 전 궁중의 제례악으로 사용되었다가 함께 교주하였다. 또한 일무는 회빈문 외곽에 설치된 원구단(圓丘壇)에서 연희되었다. 고려의 원구단은 중국의 제도를 수용한 것으로 크기는 중국보다 1/6정도이며 층수도 중국은 4단인 반면 고려는 1단으로 되어있다. 이는 일무의 무원(舞員)수와 악기편성에 있어 송과 고려가 차이 있는 것과 관계있을 것 으로 추정된다. 이와 같이 고려의 원구제가 중국의 예제를 수용하였으나 선택적으로 재편하여 사용하였으며 의례와 함께 연희되는 춤 또한 국가의 규모에 맞게 구성하여 진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원 구제의 춤(일무)이 유교 외에도 우리 고유의 전통이 혼용된 것으로 자주성과 독립성을 지니고 있 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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