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고는 德山洞府를 문화지리학적 측면에서 접근한 것인 바, 남명이 산천재에 게시했던 「신명사도」와 덕산동부가 일정한 함수관계에 놓인 다는 가설에 기반한 것이다. 구조적 측면에서 입덕문은 口關 역할을 하며, 확 트인 덕산동부는 태일진군이 다스리는 나라일 수 있다. 사상적 측면에서는 堯舜日月의 유가적 이상과 武陵桃源의 도가적 이상이 상호 맞물린다. 덕산 공간 역시 「신명사도」에 근거하여 그 경계지점에 입덕 문이 놓이고, 덕천벼리라는 좁은 공간을 통과하면 안쪽에는 넓은 공간 이 나타난다. 廣-狹-廣의 구조 속에서 독특한 문화가 생성되었던 것 이다. 덕산에는 남명 관련 이야기가 언중에 의해 다양하게 전해지고 있다. 남명이 덕산에서 사치를 즐겼다, 자신을 사모하다가 구렁이가 된 처녀 와 함께 살았다, 幽宅을 친구에게 주었다가 사후에 돌려받았다, 퇴계와 도술 시합을 벌여 이겼다는 등의 이야기가 대체로 그러한 것이다. 이러 한 이야기는 주로 덕산 일대에 민중 사이에서 광범하게 전해지는 것으 로, 「신명사도」와 덕산동부의 상관성과는 또 다른 측면의 구술문화를 형성하였다. 민중들은 남명 이야기를 흥미 본위의 대항 담론으로 이끌 어 간 것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