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검색조건
좁혀보기
검색필터
결과 내 재검색

간행물

    분야

      발행연도

      -

        검색결과 2

        1.
        2024.03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청말 사상가들은 시대성을 강조하게 되면 민족 전통성이 소 홀하게 되고, 민족성을 강조하면 시대적인 진보사조(進步思潮) 에 뒤떨어지게 되는 곤감성(困感性)을 고민하였다. 여기서 시대 성이란 바로 서학(西學) 수용의 자세에 수반되는 문제이며, 민 족성이란 중국 전통성을 고수하는 데 따르는 문제일 것이다. 강유위(康有爲: 1858-1927)는 청나라 말기 아편전쟁(鴉片戰 爭)과 남경조약(南京條約)·태평천국(太平天國)의 난(亂)을 거치 며 중국 역사상 가장 큰 국가적 위기에 태어난 인물이다. 이때 는 서양문명과 중국의 전통적인 사상이 교차하는 시기이다. 이 러한 시기에 여러 제국주의 열강의 침탈에 따라 중국의 주권이 크게 제약되고 영토까지 분할되는 가운데 지식인들이 새로운 개혁사상을 일으켰다. 본 논문은 기존의 강유위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그가 남긴 자취에 대한 문예 미학 사상을 포괄적으로 연구하고자 노력하 였다. 이를 서술하는 데 있어서 바탕이 되는 것은 그가 세계를 인식하는 세계관인 변법(變法)적 사유의 형이상학적 틀이다. 첫 째는 원기론(元氣論), 둘째는 변법(變法), 셋째는 비학존중(碑學 尊重) 사상을 바탕으로 하여 특히 서예 예술이 크게 변화해야 한다는 주장을 강조하였다. 특히 강유위의 미학 사상은 서예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금 석학 중심의 비학 미학 사상과 존비경첩(尊碑輕帖)의 서예 미 학 사상을 전개하였다. 그는 첩학(帖學)의 음유미(陰柔美)에 대 비해 비(碑)의 양강미(陽剛美)를 강조한다. 강유위가 양강미를 선도한 이유는 생명미가 깃든 약동적이며 역동적인 아름다움이 담겨있기 때문일 것이다. 강유위는 기존 서예풍조의 하나인 첩학(帖學) 위주의 서예는 온화하고 세련되어 있지만 연미하여 힘이 없는 것이 마치 정치 적으로 대국의 힘이 없는 것과 암암리에 연결되어 있다고 보았다. 이에 강유위는 정치적으로 변해야 된다는 이론을 문예 미 학 사상에 적용하여 양강미를 담은 비학(碑學)을 추숭하였다. 이러한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서예의 발전은 고대부터 현재까 지 언제나 근본적으로 사회적 변화에 기초함을 알 수 있었다.
        7,000원
        2.
        2018.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강유위(康有爲. 1858∼1927)는 청나라 때부터 중화민국 때까지의 사상가이자 정치가이며 뛰어난 서예가였으며 교육자이다. 그는 장서가(藏書家)였던 조부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부터 수많은 책을 접하여 경학을 배웠다. 19세에는 대학자인 주차기(朱次琦)의 문하에 들어가 육구연(陸九淵)과 왕수인(王守仁)의 사상에 심취하였다. 또한 서양의 자연과학과 사회학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정치적 개혁에 많은 포부를 가졌다. 그는 전통적인 인습(因習), 주자학적 권위주의, 과거제도가 요구하는 것에 대해 반기를 들었다. 광서제(光緖帝)에게 변법(變法)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상서(上書)를 7차례 올리며 ‘무술변법(戊戌變法)’의 주도자로 나섰으나 실패하자 해외로 16년 간 망명하였다. 그는 평생 유명한 저서를 다수 남겼으며, 일찍이 구양순을 배워 풍골경발(风骨勁拔)한 서예로서 이름을 날렸다. 훗날 육조비판(六朝碑版)을 두루 접한 뒤로 당인(唐人)을 버리고 북비(北碑)를 지향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글씨는 근엄한 법도(法度) 속에서도 변화와 창신을 발휘하며 자신만의 독창적인 경지를 형성했다. 특히 그의 서론(書論)인 비학(碑学)을 이론적으로 종합 정리한 『광예주쌍즙(廣藝舟雙楫)』은 서예계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처럼 그의 서예와 서학이론은 근⦁현대 서예계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본고는 강유위 ‘서예실천’에 대하여 살펴보면서, 그가 주장했던 서예이론과의 관계를 기술하였다. 그의 이념과 사상 간에는 내재적 연계와 함께 내재적 모순이 공존한다. 다시 말해서 본고는 강유위의 『광예주쌍즙』의 한계를 논하는 것에서 벗어나 그의 중⦁만기시기 서학이론의 변화 및 그의 서학이론과 실천의 모순에 대해서도 다뤘다. 아울러 그의 서예작품의 기법과 풍격 등을 바탕으로 그의 서예이론사상의 맥락을 귀납, 정리하여, 종합적인 평가를 하려고 노력하였다. 강유위는 운필에서 방원(方圆)의 겸용을 주장했고, 특히 그의 행서에는 북비의 의취가 녹아들어가고 필획과 골력이 강건하며, 필세가 기울고 험절(險絕)하여 웅강하고 아름다운 기운을 내포하고 있다. 결체에서는 방필(方筆)의 후중함을 통해 서예의 부족한 듯하며 두터운 형태를 드러냈다. 그리고 단정하고 너그러운듯하면서도 자연스럽고 꾸밈없는 모습을 잃지 않았다. 장법은 들쭉날쭉 엇갈린 멋이 생기고 흥겹고 방종하면서도 호탕한 기운이 흐른다. 이로써 그의 서예는 ‘이기위승(以氣為勝), 이력위미(以力為美)’의 독특한 풍격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의 만년서예는 대체로 비첩융합(碑帖融合)의 모습이 보인다. 특히 행초서의 용필에는 강한 개성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의 행초서는 위비(魏碑)에서 비롯되어 전⦁예가 겸비하고, 장초(章草)와 첩학으로 흘러들어가는 등 다양한 서체가 뒤섞여 나타났다. 강유위는 많은 저술과 수많은 서예작품을 남겼다. 이러한 방대한 자료 에서 그의 서예작품과 서학이론을 분석하고 검토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이에 본고의 미흡한 부분에 여러 선배와 독자들의 아낌없는 질정(叱正)을 희망한다.
        8,7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