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의 목적은 예이츠의 초기 글에서 예이츠의 문학에 대한 생각이 어떻게 발전되어 가고 있는지 살펴보는데 있다. 그 중에서도 글에서는 특히 사무엘 퍼거슨 및 클래런스 맨건과 같은 아일랜드 작가, 그리고 보다 전반적인 아일랜드 문학에 대한 바람과 우려에 대해 예이츠가 어떻게 논의하고 있는지에 대해 알아볼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이 논문에서는 선배 작가에 대한 예이츠의 글, 그리고 그가 아일랜드의 문학적 어젠다를 수립해 가는 과정에서 겪었던 문제에 대해 이야기 하는 과정에서 훗날 예이츠 자신의 시와 드라마가 나아갈 방향에 대한 단초를 제공하는지에 대해 논의하고자 한다.
고려후기의 불교계는 귀족 중심의 불교에서 벗어나 일반 대중 중심의 불교운동 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교단의 변화 분위기에 따라 불교에 귀의하여 信行 했던 승려들의 출신성분도 다양해져 이전까지 주를 이루었던 귀족 출신 승려보다 는 오히려 민간 출신의 승려가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이때 등장하여 불교계를 이 끌어 갔던 승려들은 대부분 당시에 불교계를 풍미하던 禪宗에 속해 있으면서 불 교를 문학으로 형상화하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이러한 승려들로써는 慧諶 (1178-1234), 天因(1205-1248), 一然(1206-1289), 冲止(1226-1293), 景閑 (1299-1374), 普愚(1301-1382), 惠勤(1320-1376) 등을 예거할 수 있는데, 이들 은 대부분 일반 사대부가문 출신으로 그중에는 儒業에 관심을 가져 儒經을 공부 한 뒤에 과거에 합격했던 경력의 소유자가 있기도 하다. 冲止는 19세에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관직생활을 하다가 29세에 祝髮入山하여 승려의 길로 들어선 인물 이다. 그가 일찍이 유학을 공부하고 문학수업을 받았기 때문에 승려가 된 뒤에도 속세 문인들의 문학적 聲價에 못지않은 작품들을 남기고 있어 고려후기 불교문 학을 훨씬 풍부하게 만들어 갔다. 그가 승려로서 문학에 관심을 가지고 부단하게 세상에 관심을 가진 것은 바로 불교가 단순히 내세를 기원하는 비현실적인 종교 가 아니라 부당한 현실의 질곡에서 신음하는 대중들의 고통을 위로하기 위해 그 들과 함께 하는 현실적 종교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불교관을 가지고 있던 충지는 세속을 초탈하여 물욕을 버리고 마음을 문학에 의탁하여 詩 와 더불어 노닌다는 禪的詩觀을 보일 수 있었다고 하겠다. 충지는 운문과 산문에 걸쳐 많은 작품을 남기고 있지만 그의 시를 통하여 그의 문학세계는 물론이고, 아 울러 고려후기 불교문학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다. 충지가 남긴 한시를 분석해 보 면 승려로서 불교의 교리를 읊은 것보다는 세태인심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표방 하거나, 자연의 아름다움과 질서를 노래한 것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특히 그의 시 에서 나타나는 현실에 대한 관심과 대중들에 대한 애정은 고려후기 불교문학이 일반 대중들을 교화하고 절망에 빠진 그들을 구제하는 데 깊이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남명 조식은 자신에 대해서는 실천적 행실을 무엇보다 강조하였고, 대물에 대 한 관점은 실용적 측면을 중시하였다. 이러한 삶의 태도는 그의 문학에 대한 태 도에 있어서도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난다고 할 수 있는데, 그는 문학을 대하여 서도 실용성을 매우 강조하였다. 그는 젊었을 적에 한 때 문학으로 이름을 드러내기도 하였으나, 성인의 학문 을 자신이 공부할 목표로 정한 뒤로부터는 문학을 멀리하였다. 그는 스스로 시 는 완물상지하기 쉬우므로 배워서는 안 된다고 하였고, 그의 제자 정인홍에 따 르면 그는 항상 시황계를 지니고 다녔다고 한다. 남명이 이처럼 시를 배격하였다면 그의 문집에 시가 있을 수가 없을 것이지 만, 그의 문집에는 많은 수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한편으로는 시 벽이 있어 시를 짓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다고 하였다. 남명은 결국 시를 멀리 하면서도 시를 짓지 않으면 안 되었는데, 물론 시흥이 나서 어쩔 수 없이 지은 경우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바로 실용적인 목적으로 시를 지었던 것이 다. 특히 문장의 경우에는 이른바 문예문에 속하는 글도 전혀 없지는 않으나, 많은 작품들이 실용성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처럼 실용성에 근거하는 남명의 문학관은 작품 속에서 대략 세 가지 정도로 드러나 있음을 볼 수 있다. 첫째는 본성이나 바탕과 같은 근본을 중시하는 것이다. 그는 「원천부」에서 온 갖 이치가 모두 본성에 갖추어져 있다고 하였는데, 작품을 지음에 있어서도 이 러한 생각은 그대로 드러나 있음을 볼 수 있다. 둘째는 현실과 일상과 같은 현재를 중시하는 것이다. 그가 「을묘사직소」와 「무 진봉사」에서 드러낸 것과 같이 작품 속에서 현실과 일상을 중시하는 생각은 다른 산문에서 뿐만 아니라, 몇몇 시 속에서도 이러한 것을 찾아볼 수 있다. 셋째는 사실을 중시하고 허명을 싫어하는 것이다. 그가 사실을 중시하였던 점 은 그의 작품 속에서 그가 스스로 여러 차례 말한 바 있다. 특히 묘문을 지으면 서 그는 고인에게 아첨하지 않겠다고 하였으며, 훌륭한 학자라는 빈 이름으로 세상을 속인다는 생각을 여러 작품 속에서 밝힌 바 있다. 이상에서 살핀 바와 같이 남명의 문학작품 속에는 그가 문학을 멀리하면서도 왜 작품을 짓지 안 되었는가 하는 사실과 문학작품을 지음에 있어서 무엇을 강 조하였는가, 그리고 문학작품 속에 드러난 것을 통해서 그가 무엇을 중시하였 는가를 살필 수 있었는데, 이러한 것이 결론적으로 그의 실용주의적 생각과 맞 닿아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