劉基(1311∼1375)는 원말명초의 정치가, 군사가, 사상가이자 문학가다. 유기는 원과 명의 두 왕조가 교체되는 시기를 살면서 그의 삶과 문학 역시 그 영향을 깊이 받았 다. 유기는 1300여수의 시를 남겼으며, 그의 시는 대체로 주원장에게 초빙된 다음해 인 1360년(元 至正 20년)을 기점으로 전후기로 나눌 수 있다. 전기시의 경우 사회비 판과 풍유, 교화를 중시했다면 후기에 창작한 시는 개인감정에 대한 묘사가 주를 이 루는 경향을 보인다. 「感時述事十首」는 유기가 48세였던 1358년에 창작한 연작시로 사회현실에 대해 관심을 가졌던 전기시의 주요 경향을 잘 보여준다. 元 왕조 치하에 서 삶의 대부분을 살았던 유기는 원말의 혼란한 상황과 백성들이 겪은 고통을 목도 하고 이를 「感時述事十首」에 생생하게 담았다. 유기는 「感時述事十首」에서 원말의 관리부패, 군대적폐, 황제무능, 화폐남발 등의 여러 사회폐단에 대해 비판하고, 이런 폐단으로 인해 고통받는 백성들의 삶에 마음 아파했다. 이는 宋詩의 ‘의론으로써 시 를 쓰는(以議論爲詩)’전통을 계승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동시에 유기 자신이 가지 고 있었던 문학은 세상에 쓰임이 있어야 한다는 經世致用의 유가적 문학관점의 발로 라 할 수 있다.
본 논문은 상상과 관련된 이론을 상상의 속성, 상상력 발휘의 조건과 관건, 상상력과 언어표현의 관계로 나누어 설명했는데 유협이 <文賦>의 내용을 바탕으로 자신의 이론을 전개했음을 볼 수 있다. 창작의 경로를 思→意→言로 인식한 점도 그러하다. 그 중 상상력 발휘의 조건을 허정(虛靜), 학문(積學), 이치(酌理), 독서와 연구(硏閱), 정취(馴致)로 세분화한 점이나 상상력의 관건을 통솔하는 요소로 志氣를 제시한 점 등은 육기의 이론을 더욱 발전시킨 부분이다. 두 사람의 이론을 동일선상에서 비교하는 것은 무리가 있지만 본 논문은 육기가 창작자의 시각으로 문학의 문제에 접근했다는 점에 중점을 두고 있다. 육기는 창작의 고통을 깊이 체험하고 <文賦>에서 상세하게 묘사했다. 유협은 상상의 근본원리에 대해 분석하고 이론적으로 접근했지만 육기는 불가지의 영역으로 인식했다. 오히려 상상이 막혔을 때의 고통에 대해 묘사했다. 이런 특징은 문체론에서도 명확하게 나타나는데 유협이 뚜렷한 기준을 설정하여 문체를 구분하고 각 문체의 특징을 상세하게 서술하는데 중점을 둔 반면 육기는 문체운용에서의 임기응변과 창조성을 강조했다. 역시 창작자의 입장이 투영된 것이다. 이러한 특징은 두 사람의 이론이 문학의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의 차이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