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음향 모델링은 해저지층을 통한 음파 전달과정을 모형하기 위해 발달해 왔다. 이러한 작업은 음파 전달을 제어하는 지층의 지음향 특성값을 측정 추론 예측한 값을 필요로 한다. 동해안 옥계와 북평지역 연안에서, 해저지층은 제4기층과 함께 제3기 퇴적층, 음향학적 기반암 등으로 구성된다. 옥계 연안지역 해저지층의 기반암은 주로 고생대 평안층군의 암석으로 해석되며, 이 암석의 평균 P파와 S파 속도값은 각각 4276 m/s와 2400 m/s이다. 북평 연안지역 해저지층의 기반암은 주로 고생대 초기 조선누층군의 석회암으로 해석되며, 이 암석의 평균 P파와 S파 속도값은 각각 5542 m/s와 2742 m/s이다.
花林洞, 尋眞洞, 猿鶴洞 등 安義三洞은 예로부터 그 풍광이 아름다운 데다 뛰 어난 문인들의 자취가 서린 곳이기에 그 이름이 높았다. 심진동의 長水寺에는 노진이 젊은 시절 독서를 하였고 특히 <遊長水寺記>를 남겨 심진동의 이름을 후대에 길이 전해지게 하였다. 이 논문은 盧禛의 <遊長水寺記>를 중심으로 하 되, 杜慧의 <安陰長水寺與龍湫菴創修源流興廢錄>, 明察의 <安陰縣德裕山長水 寺大雄殿重營記>, 應允의 <德裕山尋眞洞記> 등의 새로운 자료를 통하여 장수 사의 역사를 밝혔다. 장수사는 나말여초 覺然이 창건하여 여말선초 無學이 중 창하였으며, 그 후 조선 초기 다시 朴習에 의하여 중창되어 그 집안의 원찰이 되었다. 그 후 1680년 화재로 장수사는 전소되고, 지금의 장수사 일주문이 있 는 곳으로 옮겨지었다. 1721년까지 건물이 하나씩 복원되어 大雄殿 외에, 八相 殿, 斗月寮, 滿月堂, 明鏡堂, 曺溪門, 天王門 등이 차례로 조성되었다. 또 1725 년 원래 장수사가 있던 자리에 용추암을 조성하였다. 이러한 역사를 가진 장수 사에 노진이 유람을 하고 <遊長水寺記>를 지어 세상에 그 이름을 널리 알렸다. 조선 후기에는 沈錥, 南公轍 등 뛰어난 문인이 장수사를 소재로 한 시문을 제작 하였다. 이러한 글로 인하여 장수사 일대의 아름다운 풍광이 오늘날까지 전하 게 되었다. 오늘날 장수사는 일주문만 남아 있고 근래에 세운 용추사가 그 명성 을 대신하고 있는데, 이러한 장수사를 빛낸 옛글을 통하여 장수사의 예전 모습 을 즐길 수 있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