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 assume that, even though Jeju Island ‘Peace’ Cherry Trees (1913), happened at different time and places, it connects each other as (1919) and Busan UN Forces Cemetery (1951) as an important connected diplomatic event of Provisional Government and Republic of Korea positively. Especially, it will bring a significant positive impact to Asia Community if we organize 2023 Korean Week Event: The First Korea Congress (1919) and Busan UN Forces Cemetery (1951) and suggest the invitation issues of UN Asia Headquarters to the Republic of Korea (2023) into Busan metropolitan city(Seoul, Kyunggi, Jeju Special Self-Governing Province) of Republic of Korea. We also assume Korean’s tolerance philosophy will Koreans to unite each other together if they will succeed to share spirit of tolerance from Busan UN Forces Cemetery. We have 2314 graves from 11 countries at the graveyard for UN Forces in Busan, which was built as the UN Headquarters Cemetery in January of 1951 and used as memorial space for participation in the Korean War, who had involved the War beyond their sacrifices. Recently we had 13 veterans, who got buried coming from 4 Americans, thre Hollanders, 2 Frenchmen, 2 Germans, 2 Englishmen, 1 Canadian and 1 headband after they died in their countries. (Joongang daily newspaper June 19, 2022). In the end they become Asian spirit of Toleran명 at the Busan UN Forces Cemetery beyond borders.
본 연구에서는 아시아·태평양전쟁 시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사외교를 통한 대외적 자율성 확보 정책을 분석하였다. 아시아·태평양전쟁은 임시정 부의 활동 공간을 확장시켰다. 전쟁이 발발하자 임시정부는 중국으로부터 한국광복군에 대한 자주성을 회복하고, 미국·영국 등 연합국과 군사합작을 통해 전후 승전국의 지위를 얻고자 하였다. 미국과 영국은 정치적으로는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았으나 군사적으로는 임시정부와 협력관계를 유지 하고자 하였다. 임시정부에서 추진했던 군사외교활동이 국가의 대외적 자 율성 확보 측면에서 갖는 함의는 다음과 같다. 첫째, 대외적 자율성 확보 를 위해서는 대내적 환경의 안정성이 선결되어야 한다. 둘째, 대외환경의 변화는 대외적 자율성을 추구하기 위한 기회이자 위협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셋째, 강대국과의 이해관계가 일치되는 요소는 대외적 자율성 확보 에 유리하게 작용한다. 임시정부는 아시아·태평양전쟁이라는 기회를 활용 하여 최종적으로 임시정부에 대한 연합국의 승인을 얻어내고자 하였다.
일제 식민통치하에 한국은 1920년까지 집회와 결사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았다. 이러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 한국 기독교회는 민족운동의 유일한 공간이요 은신처였다. 그래서 수많은 민족 지도자들이 교회에 들어와 기독교 신앙을 통한 국권의 회복과 나라의 독립을 위한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른바 ‘기독교 민족주의’ 운동이 한국의 민족운동사에 전개되었다.
본 논문은 1919년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탄생 100주년을 앞두고 3.1운동과 임시정부 탄생에 기독교 민족주의자들이 어떻게 활동하였고, 얼마나 기여했는지, 그 내용을 ‘기독교 민족주의’ 시각에서 밝히고자 한다. 따라서 이 논문의 범위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과정과 그 후 임시정부 통합과정에서 활동한 기독교 민족주의자들의 역할을 중점적으로 다루고자 한다. 시기적으로는 1919년 3.1운동 직전부터 상해임시정부가 수립되고 1920년 12월 5일 이승만이 상해에 도착하여 직무를 수행하기 시작할 때까지 이다. 그리고 본 논문은 기독교 민족주의자들 가운데서도 중국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하는 과정 가운데 가장 대표성을 띠는 기독교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다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