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읽는 일은 사물을 읽은 일과 같다. 유식과 무식을 떠나 인간은 생존을 위하여 끊임없이 주위의 대상들을 읽어야 한다. 그런데 인간은 사물자체 혹은 본질에 도달하기가 불가능하다. 그리하여 사물자체가 아니라 사물에 대한 의미생산에 그치고 그 의미는 타자들에 의해 상속되고 갱신된다. 따라서 주/객의 일치를 선언한 그리스도를 제외하고 인간사회에서 객관적인 대상으로서의 사물, 사건, 작품에 대한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견해는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상대적인 관점에서 사물을 바라봐야 하는 운명을 지니고 때어났다. 항상 밑바닥에서 시작해야하는 시시포스의 운명처럼. 이런 관점에서 읽어본 본 작품의 내용은 영국의 탄압에 직면하여 식민지 아일랜드의 내/외의 비우호적인 상황을 제시하고 있는듯하다.
이 논문의 목적은 마이클 로바츠의 이중 비전이 어떻게 선불교 명상을 표현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 시는 선 불교명상의 진행 단계에 따라 구성되 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명상의 기본적인 관심사 즉 이원론에 대한 문제, 시간의 개 념, 그리고 이세상의 한계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욕망을 다루고 있다. 이러한 선 불교 명상의 요소들이 특정한 상징, 시의 세팅, 그리고 다양한 시적 테크닉을 통해 나타나 고 있다.
예이츠는 시를 쓰고 편집한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시집 속의 어떤 시 모음은 대체적으로 그 책의 큰 그림 내의 서로의 소통을 보이며, 결국, 시들이 어 떤 시들과 가까이 놓였나를 검토함으로써 독자들의 그 시들에 대한 이해와 감상을 깊 게 한다. 마이클 로바티스와 춤꾼 의 마지막 4편의 시가 분명 그런 경우이며, 어려운 시기에 태어난 사랑하는 딸을 가지는 것에 대한 복잡한 심정으로 고심하는 새 아버지 로서의 예이츠를 보여준다.
예이츠의 “The Double Vision of Michael Robartes”는 대개 그가 쓴 A Vision의 맥락에서 분석되어지고 있다. 즉 Ellmann, Bloom, Henn, 그리고 Bornstein 같은 비평가들은 시인이 서로 대립되는 세계로 분류한 제 일 장과 제 십오 장을 합일하려는 시도에 초점을 맞추어 이 시를 해석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 밝혀지지 않은 사실은 이 시는 전형적인 동양의 명상 과정을 모델로 그 구조가 이루어져있고 그 명상 의 목적은 육체나 영혼, 삶과 죽음, 그리고 움직임과 정지와 같은 서로 대립되는 세력의 조화로운 합일 뿐 만 아니라 동양과 서양의 합일이라는 예이츠의 정치적의식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가 그의 여러 글에서 주장했던 유럽과 아시아의 합일의 꿈이 자비를 의미하는 동양의 상징인 부처와 지성을 의미하는 서양의 상징인 스핑크스의 합일이라는 형식을 빌려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으며 이것으 로 우리는 그가 민족주의의 한계를 느껴 서서히 민족주의자에서 세계주의자의 의식으로 전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대부분의 시가 그렇듯이 동양과 서양의 결혼의 가능성에 대한 언급은 있지만 그것이 구체적으로 실현될 지에 대한 시인의 명확한 대답은 유보되어 있는 형편이다. 이는 예이츠가 평생을 바쳐 풀려다 결국 풀지 못한 초월세계에 대한 의구심 때문이 아닌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