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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5.0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이 글은 15세기 후반에 제작된 아미타여래삼존상의 새로운 제작 경향을 확인하고 수륙재 와의 연관성을 확인하는 데 목적이 있다. 15세기는 아미타여래삼존상의 제작이 활발히 이루어졌으며, 두 가지 주요 경향이 주목된 다. 첫째, 아미타여래삼존상은 중대형으로 제작되어 주불전의 중심 존격으로 조성되었다. 이 는 아미타여래삼존이 당시 신앙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둘째, 대세지 보살과 함께 지장보살을 협시로 한 아미타여래삼존상이 활발히 조성되었다. 이는 당시 불교 의례와 신앙에서 지장보살의 역할이 중요했음을 보여준다. 수륙재는 망자의 극락왕생과 산 자의 현세안녕을 기원하는 두 가지 핵심 목적을 지닌 불 교 의례였다. 이는 15세기에 간행된 天地冥陽水陸雜文과 天地冥陽水陸齋儀纂要의 제목에서 하늘[天]과 땅[地, 지옥], 영혼의 세계[冥], 사람의 세계[陽]를 모두 아우르는 것에서도 확인된다. 무엇보다 천지명양수륙잡문에는 아미타여래삼존과 정토를 상징하는 변상도가 처음으로 등장하며, 지장신앙과 관련된 소첩을 통해 지장보살의 역할도 강조된다. 이를 바탕으로 15세기 후반에는 아미타ㆍ관음ㆍ대세지 삼존상뿐만 아니라 명부의 권위자인 지장보살이 극적인 요소를 더하며 아미타ㆍ관음ㆍ지장 삼존상 역시 중대형으로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수륙재를 위해 아미타여래삼존상을 조성한 사례로 보은 복천사와 강진 무위사가 주목된 다. 복천사는 1451년 세종의 수륙재를 위해 아미타ㆍ관음ㆍ대세지 삼존상을, 무위사는 1478년 수륙사 중창을 위해 아미타ㆍ관음ㆍ지장 삼존상을 조성했다. 이를 통해 15세기 후 반에는 수륙재를 거행하면서 대세지보살 또는 지장보살을 협시로 한 아미타여래삼존상이 모 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15세기 후반 아미타여래삼존상은 수륙재 성행과 맞물리며 전각에 봉안되는 중심 존격으 로 조성되었다. 그동안 현존하는 사례의 부족으로 주목받지 못한 조선 전기 불상의 조성배경 과 현상 변화를 종합적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는 조선 전기 불상을 보다 심도 있게 해석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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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23.06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이 논문은 수륙재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살펴보기 위해 기술되 었다. 수륙재의 성립과 전개에는 두 가지 관점이 작동되는데, 첫째 관점 은 수륙재의 의미론적 양상을 중심으로 성립을 설명하는 것이고, 둘째는 현재에 전승된 수륙의문(儀文)의 성립과 변용 등을 중심으로 설명해 보는 것이다. 수륙재의 과거 위상은 국가 의례의 성격이 대단히 농후하다는 것이다. 수륙재의 기원으로 알려진 양나라 무제가 설행한 것 등 국가나 왕후장상 이 주로 수륙재회를 열었으나 일반 민중도 공덕을 쌓기 위해 수륙재를 열었다. 왕실 의례라는 성격은 선영(仙靈)을 연에 모시는 시련(侍輦)에서 잘 확인이 된다. 수륙재의 현재 양상은 설판(設辦)의 축소 등으로 인해 의례의 일반화 가 일어나 수륙재의(水陸齋儀)의 모습이 잘 나타나지 않으며. 19세기 이 후에는 수륙의문의 발간이 일어난 사례가 보이지 않는다. 현재 국가중요 무형문화재를 제외하면 일반적인 재회를 수륙재라고 하는 등 다양한 형 태로 진행되며, 의례 주체의 이원화, 설단 등은 법당 안의 모습을 실외로 옮긴 듯한 양상으로 진행된다. 수륙재의 미래는 재회(齋會: 음식을 제공하는 의례)의 의미가 살아나야 하고, 설행을 내부와 외부의 승려와 재자가 같이 참여해야 하며, 동참자 가 내용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야 하며, 본래 목적의 달성을 추구함과 동시에 전통 문화적인 요소가 사라지지 않도록 유념해야 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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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17.08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본고는 인도의 시아귀회(施餓鬼會)를 수용한 중국의 수륙재(水陸齋)가 독자 적인 내용과 목적으로 변용된 양상과 함께, 그것이 고려에 전래되어 조선전기 수륙재 설행의 유행에 문화적 기반이 된 추이를 개괄한다. 또한 조선전기에 이 르러 전사회적으로 크게 유행하게 된 수륙재의 설행양상을 그 대상과 목적을 중심으로 살피어, 조선전기에 국가주도적으로 거행된 수륙재가 조상 등 특정 영 가의 천도를 중심으로 하는 불교식 상제례(喪祭禮)로 수렴되어 간 면모를 밝힌 다. 마지막으로 무차대회(無遮大會)의 개념적 차별성을 주목하여 조선전기에 일 반적으로 인식되었던 수륙재와의 차이를 확인하고, 그것이 조선 중기 이후 ‘여 제(厲祭)’라는 유교식 국가제사로 대치되거나 민간불교를 중심으로 하는 독자적 방향으로 변모해 간 흔적을 조망한다. 조선전기 수륙재는 특정 또는 불특정 망자에 대한 불교적 구제를 목적으로 설행되었다. 그 각각을 대표하는 것이 왕실의 조상(祖上)을 대상으로 하는 불교 식 상제례로서의 수륙재와 고려 왕씨를 위한 추천(追薦) 수륙재이다. 그 중에서 도 전자가 더 중요한 것으로 파악된다. 특히 불교식 상제례의 경우 국가의 강력 한 개입 하에 칠칠재, 백일재, 소상재, 대상재, 그리고 대상 이후의 기신재가 모 두 수륙재로 합설되었으며, 이는 수륙재가 불교식 상제례의 의례적 형식을 이루 었음을 의미한다. 한편 특정 망자를 대상으로 하는 불교식 상제례로서의 수륙재 이든 불특정 망자를 대상으로 하는 추천 수륙재이든, 그 모두가 국가의 강력한 주도 하에 제도화되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교단에 대한 국가권력의 강력한 개입은 전통시대 동아시아 3국의 공통적인 특징이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한국 불교에 강하게 보이는 특징이라는 평가가 최근 학계에서 힘을 얻는 추세이다. 조선전기 수륙재의 제도화와 정비 과정에서 보이는 국가권력의 막강한 관여 역 시 그 같은 평가에 중요한 사례가 될 것이다. 무차대회란 수륙재의 내용을 이루는 한 축으로 이해되고 있지만, 개념적으로 무차대회와 수륙재는 분리될 필요가 있다. 조선전기의 수륙재가 특정 망자 특히 조상의 천도를 주된 목적으로 하여 변용될 때, 무주고혼을 포함하여 저승과 이 승의 모든 존재들을 평등하게 풀어먹이는 데 목적을 둔 무차대회는 그와 차별 적인 모습을 띠며 독자적으로 전개되었다. 하지만 조선전기의 수륙재가 어느 순 간 주자가례(朱子家禮)와 여제(厲祭)라는 막강한 유교적 의례질서로 빠른 속도 로 대체되고 국가주도적 수륙재 설행의 전통이 단절된 이후, 무차대회는 다시 불교식 상제례의 양상과 함께 수륙재의 성격 일부로 흡수되어 민간의 불교신행 을 중심으로 하여 전사회적으로 유행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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