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箴銘文’은 유구한 역사를 가진 문체로서 주로 스스로 경계하기 위해 작성되는데 중요한 현실적인 의미를 가진다. 조선시대 주자학이 통치사 상과 핵심적인 사회 가치로 수용되면서 성리학의 ‘持敬’・‘愼獨’・‘修身’ 등 경계하는 뜻을 담던 ‘箴銘’은 널리 유전되었다. 조선전기 문인사대부에 게는 ‘箴銘文’이 문학이기 전에 생활이었다. 이런 사회적인 배경 하에 退 溪 李滉은 조선 성리학을 발전시킨 태두로서 ‘善思’의 정신을 가지고 宋 儒의 ‘箴銘’을 註疏・考證함으로써 文義를 투철하게 분석하였다. 古鏡重 磨方의 편찬 및 「聖學十圖」의 작성을 통해서도 퇴계의 뛰어난 학술적 인 성과를 엿볼 수 있다. 이외, 서예에 조예가 깊은 퇴계는 항상 箴銘을 手書하였고 箴銘을 깊이 체인하여 실제로 행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하였다. 冊板目錄에 의하여 18세기부터 退溪‘箴銘帖’은 본격적으로 간행되었고 「四勿箴」・「大寶箴」・「元朝五箴」・「毋不敬」・「思無邪」・「愼其獨」・「懲忿窒慾」・ 「屏銘」・「箴十帖」・「晦齋所製退溪所書十六詠及元朝五箴」・「思無邪 毋不敬 愼其獨 毋自欺 懲忿窒慾」 등 11종이 開刊되었다. 그중 「元朝五箴」은 17~ 19세기 鎮安・榮川・安東・禮安・慶州 등 많은 기역에 開刊되었고 가장 보편 적으로 간행된 退溪‘箴銘帖’였음으로 확인된다. 마지막으로 ‘端嚴謹重’한 글씨는 退溪의 持敬端正한 마음을 보여주었고 ‘箴銘帖’의 刊行은 퇴계의 治學精神 및 學術思想의 傳承으로 볼 수 있다. 또한, 18~19세기 退溪의 ‘箴銘帖’은 ‘端本正源’・‘衛道息邪’의 사회적인 의 미를 가지고 있었다.
后山許愈의 저작 가운데 聖學十圖附錄이 있다. 이 책은 心經附註의 예
에 따라 성학십도를 부록한 것이다. 선배 주자학자들의 글 가운데 보완 해설이
될 만한 글을 싣고, 논란이 될 만한 부분에는 특히 스승인 한주 이진상의 학설을
끌어다 썼다. 다행스럽게도 자신의 입장을 총론격으로 제시한 統論이 남아 있어
그의 독자적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그는 퇴계와 성학십도를 따라 분명
한 주리적 입장에 선다. 그는 氣가 간여하는 차이와 갈등 등을 고려해야하지만, 중
요한 것은 우주의 근본이고 마음의 본체인 理라고 말한다. 이 源頭에 대한 이해
없이, 현실에 매몰되거나 의론부터 앞세워서는 아니된다고 말한다.
여기까지는 퇴계의 주리와 별로 다르지 않은 것같다. 그렇지만 그는 한 걸음을
더 나가는데, 氣의 현실적 제약을 퇴계보다 더 가볍게, 낙관적으로 본다는데 있다.
가령, 그는 사단뿐만 아니라 칠정조차 理發이라고 말한다. 일찍이 성호 이익이 이
주장을 편 바 있다. 퇴계는 理氣의 대치를 주목하고, 둘을 균형있데 다루고 있는
데, 후산은 理쪽으로 무게 중심을 이동시켰다고 할 수 있다. 그는 互發이 理氣의
대치와 갈등이라기보다 조화와 협력을 뜻한다고 말하는 점에서 낙관적이다. 그리하
여 그는 스승을 따라 과감하게 心卽理를 주창한다. 이 주장은 당대의 특히 방산
허훈으로부터 양명학과 선의 주장과 다를 바 없다는 비난을 받았다. 이 지경은 참
곤혹스럽다. 왜냐하면 후산 자신, 가장 극력하게 비난하는 대상이 양명학과 선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자신을, 다른 누구도 아닌, 가장 비난하는 대상과 같다고 손가락
질하는 것을 그는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이들 사이를 어떻게 갈라볼 것인가. 퇴계와 후산, 그리고 양명과 禪사이의 차이
를 어떻게 갈라볼 수 있겠는가. 나는 퇴계의 자리를 주리의 전형으로 보고, 후산에
게 ‘과격한 주리’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는데, 논평을 맡은 최석기교수께서 이의를
제기했다. 또 나중 최재목교수는 후산의 심즉리와 양명의 심즉리 사이에 중요한
차이가 있다고 조언해주었다. 그들 사이의 차이를 확인하고 갈래를 정돈하는 일은
좀 더 뜸들기를 기다리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