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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성곽학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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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호

叢書 17 (2010년 4월) 6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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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성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에 한국 남해안 지역을 중심으로 서울, 평양에 이르는 지역에 倭가 개입하여 축조한 성을 말하며, 그 축조 배경에는 일본군의 남해안 거점 확보가 주목적이었고 부수적으로는 행좌소와 보급기지 역할이 병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나라 남해안 왜성은 1592년에 가덕, 웅천, 영등성을 시작으로 1593년에는 서생포, 기장, 자성대, 안골포, 거제도 등지에도 축조되었다. 이러한 왜성은 현재 남해안 일대에서 이미 확인된 것만 해도 30여 개소에 달하며, 내륙 곳곳에서도 유구는 자세하지 않으나 왜성의 기울기와 축조수법을 가진 것들이 확인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1990년대 이후에 김해, 울산, 구포, 순천, 사천 등지에서 간헐적인 고고학적 조사활동이 이루어졌으며, 최근 한일 양국에서 왜성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조사 예가 늘고 있다. 왜성이 토목이나 건축사적 입장에서 우리나라와 일본 성곽사에 차지하는 비중이 결코 적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 방면 연구는 주로 일본인에 의하여 집중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현실에서 왜성에 대한 전기한 기존의 고고학적 조사 성과와 본인이 직접 현지답사에서 얻은 자료를 집성, 분석하여 그 특징을 알아보았다. 그 결과 축조기술에 있어서는 전통적인 일본성곽요소와 우리나라 성곽요소가 혼합된 국제적 성격을 가진 것으로 판단되었다. 이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일본석성의 발전과정은 사원계 석원의 성립→安土城→舊 大坂城→ 남해안 倭城→肥前 名護屋城→근세 석성→江戶期 개수성 등의 순서인데 그 중간에 왜성이 위치하고 있다. 둘째, 왜성 입지는 강이나 바다의 돌출한 곶에 위치하고 본곽, 2곽, 3곽으로 둘러져있고 그 형태는 연곽식, 별곽식, 제곽식으로 나눌 수 있다. 셋째, 왜성에 사용된 성석은 자연석, 절단면석, 다듬돌, 장식석 등으로 구분되며, 그 변천과정은 자연석→절단면석→다듬돌→화장석이라고 할 수 있다. 말기에 보수된 성에서는 이들 3단계가 혼용되는 경우도 있다. 일본 근세성에서도 장식석까지 혼용되고 있다. 성석 가운데는 성문 입구에 게시용으로 배치한 방문석을 일본 근세성에서는 立石, 裝飾石, 記念石, 鏡石 등으로 명칭하고 있으나 그 시작은 왜성에서부터 이며 조선읍성의 방문석이 그 시원이었다. 넷째, 초기 왜성은 축조 기법상으로 우각부는 축성집단에 따라 기울기를 63°, 60°를 기준으로 하는 곳과 50°이상을 전후한 기울기를 기준으로 하는 곳이 있었다. 그러나 정유재란기에는 70°, 80°에 가깝게 급한 기울기를 갖는가 하면 성고를 높이기 위해 협축 성벽을 구사하면서 전기한 2가지 기울기를 겸용한 분절형 성벽이 나타나며 전쟁 말기에는 곡선 성벽도 나타난다. 이것은 모두 왜성에서부터 시작되었음을 잘 알수가 있다. 다섯째, 성곽의 구조적 측면으로 보면 왜성에서 시작된 치성, 적대, 등성로, 해자, 고식 고려문 등이 일본 근세 석성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가 있다. 이상과 같이 우리나라 남해안에 위치하는 왜성은 기본적으로 일본적인 요소와 조선적인 축성기술 요소가 혼합되어 발생기에는 일본적인 요소가 농후하다가, 수축기에는 점차 한국적인 요소가 증대되고 발전기에는 왜성 축조기술이 일본으로 전파되어 일본 근세 석성 발전에 기여한 것으로 판단되었다. 특히 기울기의 변천, 경석의 배치, 성석의 채택, 천공에 의한 절단방법, 성곽석과 채움석 쌓기수법, 협축과 분절형 성벽, 치와 적대, 해자, 고려문 설치 등은 우리나라가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전통적으로 축조된 산성, 읍성, 진보루 등 관방성에서 널리 사용되었던 기술 중 일부임을 감안할 때 일본 근세성은 물론 우리나라 석성 연구에 있어서도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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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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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半島의 중심부에 위치한 忠州지역에는 지금까지 忠州邑城 · 忠州山城 · 薔薇山城 · 大林山城 · 寶蓮山城 · 龍觀洞山城 · 文周里山城 · 見鶴里土城 · 彈琴臺土城 · 하늘재 山城(寒喧嶺山城) · 마즈막재嶺阨(忠州嶺阨) · 麻骨岾山城 · 烽峴城址 등 모두 13개소 城郭이 알려져 있었는데, 2009년도에 새로이 虎岩洞土城과 將台山城 2개소가 찾아졌다. 虎岩洞土城은 충주시 虎岩洞 560번지 일원에서 일부 잔존하는 土壘가 확인돠었는데, 『三國史記』에 新羅 文武王 13년(673) 9월에 쌓은 國原城(옛 薍長城)터가 高麗 高宗代 蒙古侵入期에 改築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다. 그러나, 그 실체는 土城으로서 세월의 흐름 속에 점차 황폐화되면서 高麗末期~朝鮮前期에 축조된 石築의 邑城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유명무실해 진 것으로 보이며,『朝鮮寶物古蹟調査資料』 (1942)에 보이는 烽峴城과 관련있어 보인다. 將台山城은 충주시 금가면 금가면 하담리 산 9-3임 일원에 위치하고 있는데, 관련 文獻의 기록은 없으며, 統一新羅時代의 瓦積層 위에서 확인되는 U字形의 壕유구 및 凹字形의 도랑유구 등 성벽의 축조와 관련한 새로운 구조가 확인되어 주목된다. 虎岩洞土城 주위로 山城이 배치되어 있음은 新羅의 王京이었던 慶州地域, 新羅 西原京의 治所였던 淸州地域의 城郭配置가 중심부에 邑城을 두고 外廓에 山城을 배치하고 있는 사실과도 비교되어 이와 비슷한 羅城體系를 형성하고 있어 주목된다. 忠州地域에서 다양한 구조의 城郭이 확인되고 있음은 南漢江유역에 위치한 넓은 平野를 갖고 있는 지역으로서 남북으로 이어지는 陸上 交通路 및 東西로 이어지는 水路가 발달하여 있어 地理的 要衝地이면서 戰略的 重要性이 강조되고, 지역의 政治的 位相이 높았던 결과로 보인다. 충주에서 새로이 발견된 虎岩洞土城과 將台山城은 古代 中原京을 중심으로 한 城郭의 配置 및 築城史 硏究에 새로운 자료로 여겨지며, 韓國 城郭史 硏究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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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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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목장성(牧場城) 관련 유적 중 전국에서 가장 먼저 문화재(울산광역시 기념물 제18호)로 지정된 남목마성의 입지와 공간구성, 체성의 축성법 등을 고찰한 것이다. 연구결과 남목마성은 방어진반도를 동-서로 가로질러 축조된 차단성 즉 장성(長城)이며, 내외협축의 석축성(石築城)으로 축조되었음이 확인되었다. 목장 내부는 크게 2개로 구획하였는데 외성은 석축으로 쌓은 반면 내성은 목책으로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체성의 축조수법을 보면 자연 할석(割石)을 사용하여 외벽과 내벽 모두 막쌓기한 곳도 있고, 내벽의 하단부에 판석으로 비교적 정연하게 허튼층쌓기 한 곳도 있다. 잔존 높이는 외벽의 경우 120~260cm 정도이며 평균 폭은 180~200cm 가량이다. 이 연구는 그간 목장성에 대한 연구나 조사가 매우 미흡한 상황에서 남목마성이 지닌 축조방식과 구조를 밝힘으로서 조선시대 지방의 마정사 및 목장성의 성격 이해에 작은 도움이 되고 기초자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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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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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고산성(東固山城)은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교동 ·대성동 일원의 승암산에 위치하고 있으며, 전라북도 지방기념물 제 44호로 지정되어 있다. 전주시의 동남쪽 해발 300m 남짓한 승암산(僧巖山)을 에워싸고 있는 포곡식 산성으로 둘레 1,574m, 동서 길이 314m, 남북 길이 256m이다. 성벽은 내탁식으로 축조하였으며, 서쪽구간 중 일부는 기암절벽을 이용하여 쌓았다. 특히 남쪽과 북쪽으로 뻗은 자연 능선을 감아 용도(甬道)와 같은 날개모양의 익성(翼城)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동고산성의 조사는 주로 내부 시설에 대해서 집중되어있었기 때문에 동고산성의 축성방법, 시기, 성격 등을 파악하는데 많은 제약이 있었다. 하지만 최근의 5차 조사부터는 북문지, 동문지, 남성벽 등 성벽시설에 집중하여 조사가 이루어졌다. 동문지는 일자문 형식의 현문식 구조이며, 동문지 주변성벽 내벽부의 돌출부, 차단벽, 성벽외부, 남쪽측벽 등에서 개축 또는 수축의 흔적이 보임으로써 2차례 이상의 개축 또는 수리과정을 거쳤음을 알 수 있었다. 그 형태를 보면 우선 성벽 안쪽에 차단벽(내옹성)을 두고 차단벽와 성벽사이에 양쪽으로 갈라지는 계단을 설치하여 출입하였으며, 1차례 이상의 수리과정을 거쳤다. 성벽은 내탁식으로 축조하였고, 상부에서는 내벽을 일부 축조하였다. 지대석은 경사진 곳에서는 계단식으로 흙을 잡석과 섞어 다진 다음 쌓았고, 암반이 있는 곳에서는 그랭이 기법을 사용하여 쌓았다. 외벽은 들여쌓기를 하였으며 약간 배부른 형태의 장방형 또는 방형의 석재를 이용하였다. 내벽은 바닥에 흙을 먼저 다지고 장방형 또는 세장방형의 석재를 약간 거칠게 다듬어 사용하였다. 남성벽에 위치한 집수지는 초축시기에는 평면형태 원형의 집수지를 사용하다가 이후 규모를 줄여 평면 말각장방형으로 사용하였다. 배수시설(수구)은 성벽내측으로 암거식과 개거식의 배수구를 만들어 성내부의 물이 효과적으로 입수구를 통하여 배출될 수 있도록 하였고, 성외부에는 바닥에 할석과 잡석을 깔아 물이 잘 흘러내려가도록 하여 물이 고이거나 폐여 성벽의 기반이 약해지는 것을 막았다. 동고산성은 ‘全州城’ 명 기와를 근거로 견훤의 후백제 都城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게 제시되었으나 궁성이라고 판단하기에는 지형상 평지가 적고 성내부가 좁아 궁성으로 활용되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출토유물에서도 생활용기와 철제무기류 등의 출토량이 소수에 불과해 상시 거주를 목적으로 하는 시설일 가능성 또한 낮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한다면 ‘전주성’명 기와는 전주시내와 동고산성 등을 포괄하는 도성(전주성)을 지칭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궁성은 전주시내 일원에 위치하였을 가능성이 높으며, 동고산성은 그 궁성의 배후산성으로서의 기능하였을 것으로 추정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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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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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 정장리 일반공업지역내 발굴조사에서 구석기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다양한 유구가 조사되었다. 특히, 이번에 확인된 정장리토성은 구릉 능선 가장자리를 따라 돌려져 있으며, 전체 길이는1,000~1,200m정도이다. 체성은 기초석열・영정주・판축토에 의해 축성되었으며, 체성관련 시설물로는 추정문지・4주식건물지・배수시설이 있다. 토성에서 출토된 유물은 대호경부편・개・개꼭지・인화문 편구병 등으로 8세기 중반에서 9세기 중반 정도로 편년되지만 체성에서 출토된 유물의 하한을 근거로 볼 때, 토성은 9세기 중반에 축성되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토성의 성격에 대해 지방 행정조직의 치성과 통일신라말 호족세력의 거점성일 가능성에 대해 상정해 보았다. 통일신라말의 정세로 볼 때, 재축성한 치성의 성격보다는 호족의 거점성일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이해되었다. 정장리토성의 축성 시점이 호족의 지방세력 확장과 맥을 같이하고 있음은 중요한 사실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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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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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부산․진해 경제자유구역 미음지구부지 문화재 발굴조사에서 확인된 유적을 대상으로 하였다. 조사결과 조사구역 전체를 감싸는 형태의 체성부가 확인되었으며 조사구역 남-북을 가로지르는 형태로 조사구역의 동쪽은 석축으로, 서쪽은 토축으로 체성을 축조한 형태가 확인되었다. 그리고 남쪽 토축구간 및 동쪽 석축구간에서 각 1개소씩 문지 2개소가 확인되었으며 인수구와 퇴수구가 갖추어진 배수시설이 북쪽 체성부 및 동쪽 체성부, 동문지에서 확인되었는데 체성부에서 확인된 수구는 정방형 및 장방형의 형태를 띠고 있다. 동쪽 체성 인수구의 좌우로 길이 약 28m, 폭 50㎝ 크기의 석열이 이어져 있는 것이 확인되었는데 이 석열의 기능은 성내에 차서 흘러내리는 우수로부터 체성부를 보호하는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구릉 정상부에서 확인된 체성부를 중심으로 조사대상지의 서쪽과 남쪽을 아우르는 형태로 외황으로 추정되는 완만한 ‘V'字형의 구상유구가 확인되었다. 구상유구의 전체 길이는 약 110m이고 폭은 약 3~5m, 잔존깊이는 약 1.2~2.0m 이다. 출토된 유물은 기와편 및 자기편으로 기와편이 다수를 차지한다. 출토기와의 문양은 어골문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자기류는 청자편, 백자편 및 분청사기편이 확인된다. 구랑동 유적은 고려시대 州鎭城과 함께 군사적 주요 거점에 설치된 일종의 감시초소의 역할을 하였던 戍의 성격을 띠는 유적으로 판단된다. 고려는 건국초기부터 신영토의 개척과 방비를 위하여 주요지점에 주진성을 점진적으로 축성하였는데 주진성은 거주성으로 치소나 군창 등이 형성된 것으로 생각되며 이보다 평면둘레가 작았던 수는 둘레 100~200m의 토성 또는 석성으로 축조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각각의 주진성의 관할 하에 있었다. 구랑동 유적은 해안지역의 요충지인 이곳에 전방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戍를 설치, 운영하였던 것으로 생각되며 고려전기에 동, 남해안을 약탈하여 막대한 피해를 주었던 동여진 해적에 대한 대비 목적과 더불어 점차 동여진의 침입이 줄어들고 일본과의 교섭이 진행되면서 점차 내왕이 잦아지자 이에 대한 경계의 목적도 있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6,9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