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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성곽학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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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호

叢書 24 (2013년 10월) 5

1.
2013.10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청주 父母山城은 단면 사다리꼴 모양의 협축식 전면 석축성벽, 편마암계의 성돌을 장방형으로 가공하여 10m 정도 높이로 정교하게 쌓은 체성벽, 높이 4m에 달하는 단면 삼각형의 보축성벽,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야 성안으로 진입할 수 있도록 만든 懸門式성문 등의 축성기법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축성기법은 5-6세기의 新羅城에서 공통적으로 확인되지만 동시기의 고구려성이나 백제성에서는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 요소 들이다. 부모산성 주변에는 4개의 堡壘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필자는 부모산 정상부에도 보루가 있음을 확인하였다. 작은 성을 확장하여 쌓는 경우는 있지만, 큰 성을 쌓은 후 그 안에 다시 작은 보루를 쌓는 사례는 없기 때문에 이는 父母山城보다 보루가 먼저 축조되었음을 입증하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부모산 일대에 구축된 여러개의 작은 堡壘는 백제가 쌓은 성이며, 父母山城은 6세기 중엽 이 지역으로 진출한 신라가 쌓은 성으로 추정된다. 부모산 제1보루와 학천산성 등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보루는 모두 版築技法으로 토축부를 먼저 쌓고 외벽을 석축으로 마감하는 ‘土芯石築工法’으로 쌓았음이 확인되었다. 토심석축공법은 토성과 석성의 장점을 결합한 축성기법으로서 원래 고구려의 축성기술이었지만 고구려의 남진과정에서 백제에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로부터 새로운 축성기술을 받아들인 백제는 6세기 초부터 扶蘇山城의 일부 구간과 부여 나성 등 都城뿐만 아니라 부모산 일대의 보루처럼 국경 지역의 성곽도 전통적인 土城공법 대신 이러한 토심석축공법을 적용하여 石城을 쌓기 시작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10,100원
2.
2013.10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父母山城출토기와는 크게 두 시기로 나누어진다. 즉 三國중, 百濟및 新羅기와이다. 기와의 종류는 수막새와 평기와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지금까지 발굴조사는 전체 城과 성벽 및 至近거리에 있는 堡壘성격으로 보는 유적 중, 制限的이고 選別的인 조사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부모산성의 築城시기나 補築시기, 마지막 存續시기를 모두 말해줄 수 있다고 판단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父母山城의 주요부인 城壁과 門址, 내부시설 遺蹟과 동 유적에서 출토된 적지 않은 기와등의 유물을 통하여 성벽의 축성시기와 보축 시기, 마지막 존속 시기의 단면을 알 수 있는 자료로서는 충분하다고 판단된다. 백제의 기와 중, 수막새는 아직 발견할 수 없었지만, 백제 평기와의 대부분에 관찰되는 통쪽와통(模骨瓦桶) 흔적 기와, 銘文瓦(印章瓦; 前, 後, 北등)는 적지 않게 출토되었다. 특히 西門址에 접한 城壁內側에 접한 보축 층에서 출토된 평기와는 대부분의 이 통쪽와통에 의한 제작기법을 보여주었다. 백제기와는 제작 기법을 통하여 늦어도 6세기 중반경에는 이곳에서 사용되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신라기와는 수막새와 평기와가 함께 출토되었다. 수막새는 單一한 1종의 문양이 출토된 점으로 보아 그 존속이 짧거나, 성벽의 사용기간이 짧았을 가능성을 말해준다고 판단된다. 그 시기는 古新羅말경에서 신라가 통일한 極初期경을 下限으로 한다. 특히 수막새는 제작기법에서 分離式기법을 이용하였는데, 방법이 稚拙하고 숙달된 솜씨라고 보기 어려웠다. 이러한 신라기와의 등장과 존속으로 보면, 부모산성은 신라가 통일이후, 확고한 基盤을 잡은 후에는 국가적 차원에서 그 존재의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않았을 가능성을 읽을 수 있다. 이는 이곳 출토 신라기와가 통일이후, 아직 삼국시대의 기와 제작기법과 문양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미루어 볼 수 있다. 따라서 신라가 통일 이후 신라만이 갖는 기와 (예컨대 경제성과 제작기법에서의 변화 등)제작을 하기 전에 부모산성의 폐쇄와 연계되었을 가능성을 읽게 한다.
9,800원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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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청주 부모산성과 부모산성 제 1보루, 학천산성에서 출토된 토기를 분석하여 이들 城堡의 축조 시기 및 주체, 그리고 변천상을 살펴본 글이다. 부모산성은 삼국시대 삼국의 국경지역인 전략적 요충지에 위치한 거점성이다. 그리고 부모산성과 연결된 주변 능선의 봉우리에는 작은 방어시설인 보루를 갖추고 있어 本城과 堡壘가 결합된 방어체계를 띠고 있다. 부모산성 및 주변 성보에서 출토된 삼국시대 토기는 백제토기와 신라토기가 주를 이루고 있으며, 이외에 소수의 고구려계 토기편이 확인되고 있다. 이러한 토기양상은 부모산성이 위치한 청주지역이 삼국의 주요 쟁패지역이었으며, 특히 부모산성의 축조 및 경영 주체가 백제와 신라에 의해 변천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를 구체적으로 언급하면, 부모산성은 처음에 백제에 의해 부모산 정상을 중심으로 방어시설이 구축되어 한성기~웅진기 초까지 사용되다가 6세기 후반 신라가 청주지역에 진출하면서 신라에 의해 현재의 석축산성이 축조되어 7세기 전반까지 경영된 것으로 판단된다. 이후 백제 사비기에 백제가 신라로부터 재 탈환하여 일정시기 동안 백제의 서쪽변경을 지키는 중요한 거점성으로서 활용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부모산성 제1보루는 백제 한성기~웅진기 초까지 木柵혹은 土壘로 이루어진 백제의 중요 關防施設로 경영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후 부모산성이 신라에 의해 경영된 시기에는 신라에 의해 활용되다가 백제 사비기에 백제에 의해 다시 경영된 것으로 판단된다. 끝으로 학천산성은 백제 사비기 토기가 주를 이루고 있고, 성벽의 구조 및 축조방법이 부여나성과 유사한 점 등을 통해 볼 때 백제 사비기에 백제에 의해 축조ㆍ경영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6,900원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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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산성에서는 건축부재류, 농공구, 무기, 마구 등 다수의 철제유물들이 출토되었다. 이들 철제유물의 특징과 계통, 사용 시기에 대하여 검토해본 결과, 백제계․고구려계․신라(통일신라)계 등으로 변별되었다. 이와 같이 계통 분류된 철제유물들을 연대 추정이 가능한 타 유적 출토 철기들과 대비하고, 함께 출토된 토기류의 편년과 대비해본 결과 크게 다섯 개의 획기로 나누어지며, Ⅴ기 이후에도 다시 2개의 획기로 구분될 가능성이 상정되었다. Ⅰ기는 백제 한성기 후기의 철기와 토기 등의 유물들과 이와 관련된 주거지․저장수혈 등이 나타나는 시기로서, 5세기 중후엽 이전부터 백제 세력이 점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되었다. Ⅱ기는 5세기 중후엽으로 편년되는 고구려계 유엽형․착두형 철촉 몇 점과 토기편들이 미미하게 나타나는 시기로, 이 시기부터 6세기 전반까지 고구려 세력의 관할 하에 있었지만, 城內에는 고구려 세력이 직접 주둔하지는 않은 것으로 파악되었다. Ⅲ기는 6세기 중엽~후엽, 신라계 무기류와 농공구류가 신라후기양식토기들이 급격히 돌출하는 시기로서 6세기 중엽부터 신라세력에 의해 석축산성이 축성된 후, 6세기 후반까지 점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되었다. Ⅳ기는 백제 사비양식 무기, 농공구류와 토기와 기와가 돌출하는 시기로서 부모산성을 백제가 다시 탈환하여 일정 기간 점유하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Ⅴ기는 6세기후반~7세기 3/4분기 이전으로 편년되는 장경식의 신라계 무기류, 농공구류, 건축부재류 등 대다수의 신라계 철기들이 다시 집중되는 시기로서 부모산성이 신라세력에 의해 다시 탈환되어 그 이후 지속적으로 점유되었던 상황을 반영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Ⅴ기 이후인 7세기 3/4분기 이후에는 신라토기와 철제유물은 잘 확인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7세기 중후반경, 백제(660)와 고구려(668)의 멸망과 삼국통일, 서원소경의 설치(685) 등의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종전에 비해 부모산성의 위상과 중요성이 약화되었거나 새로운 편재가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상정되었다. 그 후 8세기중엽 이후 전형적인 통일신라 토기들이 다시 나타나고 있어, 기존에 청주지역에 설치된 서원소경을 서원경으로 개칭되면서 행정개편이 이루어진 것과 연동되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이와 같이 부모산성은 5세기 중엽 ~ 8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 백제․고구려․신라가 수 차례에 걸쳐 서로 뺏고 뺏기는 각축장으로서 행정․군사․물류 거점 역할을 하였던 중요한 관방시설로서, 부모산성과 청주지역 뿐만 아니라 시기에 따라 삼국간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관방유적이었던 것으로 파악되었다.
8,400원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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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중국의 장성자원조사사업(2005∼2014)에서 보이는 새로운 장성의 정의는 무엇이며 논리적 근거로 삼은 것은 어떤 것인지, 거기에는 어떤 문제가 있는지를 살핀 것이다. 이제 중국은 길게 이어진 성벽과 거기에 세워진 關門만이 아니라 烽燧나 城堡와 같이 점점으로 떨어져 있는 시설물까지 장성으로 간주하고 있다. 이들도 성벽과 유사한 방어선으로 파악하여 장성 성벽이 없더라도 장성으로 기능했다고 보는 것이다. 또한 북방의 胡人을 막기위해 세운 장벽만이 아니라 漢人이 세우지 않은 장벽이라 해도 장성자원에 넣고 있다. 축조 주체가 누구인가의 구분 없이 역사상 명멸했던 제 왕조 모두를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해는 장성을 민족 융합의 장으로 보려는 중국 당국의 의도를 반영한 것이지만 장성은 고대 중국인과 다른 민족의 경계를 구분짓고 이동을 차단하기위한 구조물이라는 종래의 이해를 대체하기엔 여전히 역부족으로 보인다. 장성은 그 자체가 정치 군사적 경계이자 민족적 경계인 것이다. 또한 중국 학계는 西北지역의 漢代변경유적 연구를 근거로 삼아 東北지역의 烽燧線과 郡縣의 城城을 장성 방어체제의 일부로 간주하였다. 하지만 두 지역의 봉수선은 분포형태와 기능에서 전혀 다른 유적이었다. 서북지역의 봉수선은 군현의 前方에 위치하여 최전선이 되었던 것에 반해 동북지역의 것은 군현 내의 성곽을 연결하는 형태를 이루었다. 또한 전자는 봉수선의 전면에 방벽(塞)이 축조되어 방어선을 이루었지만, 동북지역에서는 새가 찾아지지 않는다. 街道를 따라 설치된 봉수선(道上燧)인 것이다. 따라서 중국의 장성자원조사사업이 의지한 새로운 정의는 서북지역에 한하여 적용될 수 있는 제한적인 것에 불과하다. 이를 근거로 동북지역에서 기존에 알려져 있던 유적을 재해석하여 장성 유적으로 간주한 것은 결코 학술적인 연구방법이라고 볼 수가 없는 것이다.
5,8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