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계는 원말·명초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명대 시단에서는 그를 ‘명대 으뜸의 시인’ 으로 칭하였다. 그의 시는 각 시대를 대표하는 시를 학습하고 이를 모방하여 창작하 는 과정에서 독특한 개성을 담았다. 그러나 창작의 황금기를 이루어야 전성기에 문 자의 화를 당하여 한 시대 혹은 한 시파를 대표할 시풍을 남기지 못하였으나 원말의 공허하고 농염한 풍격을 변혁하고 명대의 복고 시를 추동하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고계의 시의 특징은 바로 모든 시체를 골고루 디 갖추어 고전 시가 형식과 내용에 작가의 성정을 모두 담아 독자적인 풍격과 창의성으로 시대성과 다양성을 지닌다. 또 복고의 경계를 넘어 시대가 필요로 하는 새로운 작가 정신을 구현하는 창신(創 新)한 열정적인 창작으로 전통적인 고전 시와 당대 시가의 답습에 그친 명대의 복고시풍과는 달랐다. 명초 시단의 시인들이 고계를 흠모하고 그의 시를 적극 배우려 한 것도 시에 대한 순수한 열정과 서정성, 창의적 복고에 가까워지기 위함이었다.
오위업(1609-1671)은 명·청 교체기라는 왕조 변혁의 시대에 명 유신의 신분으로, 국가의 패망을 경험하고 청 왕조에 출사하여 역사에 ‘이신(貳臣)’으로 기록되는 수모 를 당한 시인이었다. 본고는 그의 시를 명조에 대한 충절과 이민족인 청조 출사에 대한 참회라는 두 주제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충절은 유교 사상에서 신하의 정신적 표상이고 변절은 유학자에게는 도덕적인 생명줄의 상실이라고 볼 때, 시인 오위업은 명에 대한 충정이 강한 신하였지만 우유부단한 천성과 청조의 회유와 압박에 굴하여 절개를 지키지 못하고 죽는 날까지 참회의 시간을 보냈다. 이신이라는 오명을 가진 시인의 주체적인 자아의 작동은 진정성을 담은 시로 창작되어 감동을 선사한다. 또 그의 시는 청초 시단에도 큰 영향을 미쳐서 명·청 시사의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