傳統時代의 漢字敎育은 한문 문장 공부 이전의 단계로 쓰고,읽고,暗記하며 올바른 인간 자세를 의식하는 全人的敎育이 集約化된 것이었다.반면 지금의 한자 교육,특히 初等한자교육은 주로 지식 차원에서 올바른 言語生活과 각 교과 학습에 기여하는 道具的인 것에 초점이 맞추어지고 있다.시대 변화와 함께 전통적인 공부 방법이 가지는 情緖的,人格的인 미덕을 점점 잃어가는 것은 아쉬움을 주는 부분이다.그러나 한자 교육의 성격이 바뀐 만큼 학습 방법에 있어서도 새로운 모색이 필요하다.전통 시대가 한자 만능이었다면 지금의 시대는 상황이 다르다.한자 학습은 근본적으로 制限된 시간 내에서 效率性을 追求해야 할 수밖에 없는 시대에 이르게 되었다.이런 점에서 앞으로의 初等漢字敎育은 ‘읽기 위주’의 방법으로 전환해야 한다.수업 시수도 확보도 쉽지 않고,또 未來社會가 요구하는 학습 내용이 산적한 상태에서 읽기와 동등하게 쓰기를 강조할 수는 없을 듯하다.오히려 쓰기에 들어갈 에너지를 訓音이해를 중심으로 하는 읽기로 轉換해야 한다.그럼으로써 한자 학습이 언어생활과 학습 전반에 효과적으로 기여하며,동아시아 지역 문화의 이해에 쉽게 다가서는 발판이 되도록 해야 한다.쓰기 학습은 읽기 학습의 보충형태로 가야하며,基本字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그리고 상황에 따라서는 생략될 필요도 있다.본고의 ‘읽기 위주’한자 학습은 訓音이해에 중점을 두고,나아가 한자어 단계에서의 語彙擴張力,活用力을 높이려는 것이다.즉 다양한 활동 및 자료를 통한 훈음 이해 단계를 기반으로,교수․학습 과정에서의 ‘한자→한자어→한자어가 들어간 문장’으로 이어지는 과정의 生産性,效率性에 대한 보다 치밀한 고려가 언어생활 및 학습 효과의 면에서 差別化된 結果를 가져올 것으로 생각된다.
이 논문은 權韠이 태어나고 성장한 곳이 그간 언급되어 온 玄石村이 아닌 新門밖 盤松坊임을 규명하고, 그 곳이 권필의 삶과 의식에 있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살펴본 것이다. 권필이 태어난 곳은 新門밖 반송방으로 추정된다. 권필의 가문이 반송방을 거주지로 택한 것은 祖父祺의 代이다. 祺는 사헌부에 있을 때, 中宗祖의 권신인 金安老를 탄핵하는데, 김안로가 危害를 가하려 하자 都城안 明禮坊에서 반송방으로 이거하게 된다. 부친인 擘은 도성 안에서 태어나 15세 무렵 부친을 따라 이거한 것으로 보인다. 벽은 文科로 진출하나 乙巳士禍期에 知己의 죽음을 목도하면서 정치 현실에 뜻을 잃고 詩에만 專心한다. 그는 항상 10里거리인 마포강가 현석촌을 찾는데, 1580년 중반 무렵에는 현석촌으로 이거한다. 1569년이 生年인 권필은 반송방에서 태어나 10대 중반 부친을 따라 현석촌으로 이거한 것으로 보인다. 일부 작품을 통해 그가 반송방에서 幼少年시절을 보냈고 이곳이 그의 의식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乙未暮春, …」같은 작품은 현석촌으로의 이거 이후에도 盤松第가 남아있었으며, 그 곳이 권필에게 懷古의 정서를 자아내게 하는 공간임을 전해주고 있다. 「家有佳樹七株, 皆先祖承旨府君手植也. …」은 특히 주목할 만 하다. 긴 제목 가운데 ‘近六十餘歲’라는 내용은 盤松第의 나무들이 1530년대 중반, 즉 祖父가 반송방으로 이거하던 초기에 심은 것임을 알게 해준다. 이 작품은 반송제의 내력만이 아니라 이 곳이 어린시절 권필의 정서와 의식을 함양해 오던 곳임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한편 舊居地에 대한 정서와 先祖에 대한 追念의 태도에서 볼 수 있는 남다른 의식은 여타 작품의 해석 및 시세계의 이해에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성장기의 대부분을 보낸 반송방은 권필에게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공간이다. 權近이래 勳舊家의 면모를 점차로 잃어가던 그의 가문이 마포 강가 현석촌을 근거지로 삼게 되는 일련의 과정 가운데 中間地點이라 할 수 있다. 권필은 가문의 전통을 의식하고 자부하지만 都城안 - 盤松坊- 玄石村의 移居로 상징되는 家勢沈降의 과정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고, 그러한 과정에서 자신을 둘러싼 世界에 대한 대응의 태도를 형성해 나갔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시에서 볼 수 있는 世界의 어두운 그림자와 自由․抵抗精神의 共存은 이러한 저변의 고려 아래 보다 잘 이해될 수 있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