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여 유희강(1911-1976)은 북위 서풍으로 현대 한국서단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주도한 서예가이다. 그는 전각에서도 두각을 나타냈지만 그의 전각작품을 심도있게 고찰한 논고는 전무한 상태이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검여의 유품 중에 전해지는 인장 실물과 그의 서화작품에서 확인되는 낙관의 인영을 총 정리하고 제작연대와 작 품성향을 분석해 다음과 같은 유의미한 내용을 도출해냈다. 첫째, 검여가 직접 새긴 인장은 33점 23세트로, 1952-1966년 사이에 집중되며, 1962년 검여서원 개설을 기점으로 전기와 후기로 나눌 수 있다. 본고에서는 검여 서화작품에서 20점 14세트의 인장을 새롭게 찾아내어 정리했다. 둘째, 전기는 등석여와 조지겸을 중심으로 청대 서가들의 전각을 두루 섭렵해 전각을 본격적으로 학습했으며, 후기는 오창석의 각풍에 주로 심취하면서도 금문과 한인의 자형 결구에 등 석여의 필세를 가미해 중후한 자신의 각풍을 구사하고 있다. 셋째, 검여의 전각돌은 대부분 한국 해남석을 사용했고, 전각기 법은 청대 서예가의 영향을 받아 충도법을 주로 사용했다. 특히 후기에는 오창석의 각풍을 구사하면서 한인과 육조 해서의 강인 한 필선을 전각에도 도입해 중후한 전각 기법을 구사했다. 넷째, 지인이 검여에게 새겨 준 인장은 21점 11세트로, 1964-1973년 사이에 집중된다. 또한 대부분 인장 실물이 현재까지도 보존되어 있어 1964년 이후 우수서와 좌수서 서화작품 에서 모두 확인된다. 다섯째, 검여의 작품에서 자신이 새긴 1-3번 인장과 여초가 새긴 24-26번 인장, 철농이 새긴 27번 인장이 검여의 우수기와 좌수기의 작품에서 낙관인으로 자주 사용됐고, 석봉이 새긴 32번 인장과 석불이 새긴 33번 인장이 두인으로 종종 사용됐다.
검여 유희강은 광복 이후 한국 서단에서 많은 영향력이 있었던 서예가 중 한 사람이다. 그는 가학과 신학문 교육기관 및 중국 유학 등을 통해 서예의 기초를 형성하였다. 또한 소탈하고 겸허한 인품으로 사람 만나기를 좋아하였고, 서예뿐만 아니라 예술 전반에 걸쳐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과 교유하며 학문 세계를 추구하였다. 그는 한학자ㆍ서지학자ㆍ시인ㆍ소설가ㆍ미술평론가ㆍ화가ㆍ전각가ㆍ미술애호가 등 넓은 인맥을 통해 학문ㆍ문화ㆍ예술 등에 대한 자외공부를 넓혀나갔던 것이다. 따라서 그의 서예는 단순한 서사 기능을 넘어서 ‘문자향ㆍ서권기’를 갖추는 경지에 이를 수 있었다. 이러한 검여의 교유에 대해 서예ㆍ한학ㆍ문학ㆍ 회화 등으로 나누어 분석하였다.
검여의 사숙에 대해서는 첩학서예와 비학서예를 나누어 분석하였다. 그는 첩학서예를 연마하면서 비학서예를 더욱 추구하였다. 그의 작품을 보면, 유용ㆍ황정견ㆍ소식ㆍ조지겸ㆍ등석여ㆍ강유위ㆍ포세신ㆍ김정희 등을 흠모하고 사숙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이들의 글씨뿐만 아니라 정신까지도 추구하였고, 이를 통해 자신의 개성 있는 서예 풍격을 형성해 나갈 수 있었다.
교유와 사숙이 검여 서예에 미쳤던 영향을 정리하면, 비첩병용ㆍ법고 창신ㆍ금석기ㆍ혼박웅일ㆍ필법입화ㆍ자외공부ㆍ불굴쇄신 등이다. 검여는 한국 서단에 북위서풍의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었고, 금석기를 추구하여 김정희의 맥을 이어 나갔으며, 좌수서의 불굴쇄신 정신으로 후학들의 사표가 되는 서예가라 하겠다.
검여(劍如) 유희강(柳熙綱: 1911-1976)은 한국 현대서단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일으킨 선구자이다. 서예작품에서 검여의 다양한 아호가 확인 되는데 선행연구에서는 서두에서 개괄적으로 언급했을 뿐 구체적인 논증을 진행하지 못했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그동안 발표된 도록의 작품을 바탕으로 검여의 아호와 당호를 재정리해 그 사용연대의 범위를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먼저, 검여(劍如)란 아호는 1952-1976년 작품에서 모두 확인된다. 그 수량이 많지는 않지만 도인(道人), 거사(居士), 학인(學人), 산인(散人)을 추가한 경우도 일부 확인되고, 1968년 뇌출혈 이후에는 왼손으로 글씨를 쓴다는 의미의 좌수(左手) 혹은 좌수서(左手書)를 추가했다.
둘째, 1964-1968년 작품에서 검(劍)자만 쓰거나 검(劍)자 뒤에 생 (生), 노(老), 도인(道人)을 추가한 경우도 일부 확인된다. 또한 불함도인 (不咸道人)은 1962-1964년, 시계외사(柴溪外史)는 1956-1963년, 청천 후인(菁川後人)은 1967-1968년의 작품에서 주로 확인된다.
셋째, 서실 관련 당호로 검여서소(劍如書巢)와 관훈서소(寬勳書巢)가 확인된다. 검여서소(劍如書巢)는 검여서루(劍如書樓), 검여서원(劍如書 院)이라고도 부르며, 검여가 1962년 11월에 관훈동 통문관 맞은편 건물에 검여서원(劍如書院)을 개원하면서부터 부르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넷째, 거주지 관련 당호로 도곡장(道谷莊 혹은 道谷書室)과 시계고옥 (柴溪古屋)이 확인된다. 도곡장은 1960-1963년 작품에서 확인되며, 시계고옥은 1955년 작품에서만 확인된다. 또한 계우(桂寓 혹은 桂洞寓), 가회우사(嘉會寓舍), 경우(京寓) 등이 확인되는데, 관훈동 서실에서 인천 자택이 너무 멀어 1963-1964년 서울의 여관에 잠시 머물면서 작품 활동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섯째, 흠모하는 인물 관련 당호로 소완재(蘇阮齋)가 보이는데, 1965 년의 작품에서 처음 확인되며 1965-1976년에 주로 사용하고 있다. 소완 재(蘇阮齋) 뒤에 주(主), 주인(主人), 주인좌수(主人左手)를 추가하기도 했다.
여섯째, 성품 관련 당호로 몽학선관(夢鶴仙館) 혹은 몽학선헌(夢鶴仙軒) 이 확인되는데, 이는 검여의 태몽과 관련된 것이다. 전자는 1964-1976년 사이의 작품에서 주로 확인되고, 후자는 1974년 작품에서만 확인된다. 또 한 1975-1976년 작품에서 눌옹정(訥翁亭 혹은 訥翁亭主人)이란 당호가 확인된다.
이상과 같이 작품에 보이는 다양한 형태의 아호 용례를 구체적으로 논증해 보았다. 이를 통해 검여의 작품을 시기별로 감상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하고, 연대미상의 작품들에 대한 제작연대를 추정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