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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4.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李資玄이 활동하던 12세기는 벼슬하여 가문을 번창시키는 것을 중요시하는 家門意識과 現實主義的인 世界觀이 유행하던 시기였다. 그런데 이러한 풍토의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던 그는 당시와는 상반된 삶을 살았으며 시세계에도 그의 특성이 나타나고 있다. 이자현 시세계의 특성을 고찰하기 위해 먼저, 그가 젊은 시절 벼슬을 버리고 은거하게 되는 이유 즉 상처, 타락한 현실에 대한 염증, 병, 사상적 경향 등을 살펴보았다. 그 중 그의 사상체계는 儒學으로 출발하여 道敎와 佛敎가 융합된 형태를 보이고 있는데, 벼슬을 버린 후에는 禪에 대한 관심이 지배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12세기에는 자연에 은둔하거나, 그러한 지향을 보여준 인물들이 적지 않게 출현했다. 흔히 이자현을 정지상․곽여 등과 같은 시세계를 지닌 것으로 파악을 하고 있지만 변별점을 찾을 수 있다. 정지상은 결국 현실로 회귀하고, 곽여는 자연으로 귀의를 꿈꾸지만 실행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자현만 자연에 귀의를 실천하여 자연과 합일을 도모함으로써 그만의 특징적인 면모를 갖게 되었다. 이자현의 시에서 자연은 현실 세계와 완전히 단절된 공간이다. 자연은 현실세계의 탐욕과 고통에서 벗어난 순수하고 청정한 사물들이고, 이자현의 天性을 보존시켜주는 요소들이다. 그리고 그의 현실적 가치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은 결국 동시대에 고통스런 현실을 비판하거나 가슴아파하는 시가 다수 창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시를 창작하지 못한 요인으로 작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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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8.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고는 영조대의 하동 안계 마을의 학자 하대관의 가문계승의식과 향촌사회활동을 알아 본 것이다. 시기는 1748년부터 1758년까지 10년에 걸친 기간이다. 하대관의 글이 오로지 이 시기에 걸쳐 남아 있기도 하지만, 이 시기의 그의 활동이 1759년 가을부터 전개되는 종천서원 시비의 배경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문집의 분석을 통해 볼 때, 하대관은 부친으로부터의 가학을 통해 자랑스러운 선조들의 업적을 알게 되어, 그의 학문은 선조들의 전통과 남명학을 이어가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이에 그의 학문은 향당에서 충절과 효행, 경의를 중시하는 성격을 갖는다. 그는 영남남인 외에도 기호 남인과의 교류를 강화하여 자신의 가문과 진주 사족들의 위상을 높이려고 했다. 『겸재집』 간행, 족보편찬, 교육과 교화활동, 부당한 조세징수 반대, 『진양지』 간행 등은 모두 이러한 그의 사상을 반영한다고 할 것이다.
        3.
        2008.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남명학파와 관련된 각 가문의 역사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던 필자는 이번에 남명 조식의 문인인 文益成 및 그의 후손의 활동에 대해 살펴보았다. 합천에 거주하던 문익성은 문과에 급제해 여러 관직을 거쳤다. 그의 아들 문 려도 마찬가지로 문과를 거쳐 중요 관직을 역임하였고, 문할도 진사시에 합격 하였다. 두 형제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형제간의 우 애도 돈독하고 부모에 대한 효성도 지극하였다. 이런 행적으로 인해 그들의 가 문은 경상 우도에서 손색없는 사대부 가문으로 자리잡게 된다. 진주로 이거한 문할의 후손들은 이후에도 이런 사족 가문의 전통을 계승하면 서 진주에서 명망가문으로 뿌리내리게 된다. 그들은 선조의 가학을 잇는 입장 에서 남명학파의 맥을 이어갔고, 또 조선 후기의 정치적 변화 속에서 남인 입장 을 견지하였다. 다른 사대부 가문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멸망한 명나라를 대신해 中華문화를 굳건하게 이어 간다는 입장에서 존주의식을 꾸준히 계승해 가고 있었다. 특히 그들은 그들 가문에 대대로 전해지던 大明花의 보호・전승을 통해 이를 실천해 가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