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주명리학 이론 중에 용신이론(用神理論)은 몸의 정신에 비유할 정도로 운 명을 추론(推論)하기 위한 가장 핵심이론이다. 용신(用神)은 일간(日干)의 역량 을 저울질하여 음양의 균형을 맞추고 오행의 구성과 조화를 기준으로 구(求) 한다. 이러한 용신(用神)의 종류와 취용법은 다양하다. 대표적 사주명리서 중에서 滴天髓는 중화사상을 근본으로 억부, 통관, 조 후, 병약용신을 취용하며, 또한 강한 기세를 따르는 종화론(從化論)을 원칙으 로 취한다. 子平眞詮은 격국에서 취하는 격국용신을 쓰며 순용용신과 역용 용신을 취한다. 窮通寶鑑은 십간을 12월에 배치하여 주용신과 보좌용신을 두며, 전체적으로 조후용신을 기반으로 하지만, 오행의 기능적 용신(用神)역할 이 스며들어 있다.窮通寶鑑 <희용제요>와 본문의 내용이 일치하지 않는 15개 부분 중 가을 甲木과 1월 庚金의 용신을 계절의 관점과 오행의 관점에서 체(體)와 용(用)으로 비교하고, 원문 검증하여 고정(固定)하였다. 비교 검토한 결과 窮通寶鑑은 조 후론을 기반으로 표현하지만, 철저한 오행의 상호기능적 관점이다. 계절의 관점 으로 본다면 가을의 甲木은 추수하는 계절에 결실이 목적이니 庚金을 우선한 다. 그러나 용신의 기능적 관점으로 보면 甲木을 보호하기 위하여, 먼저 丁火를 주용신으로 취하여 예리하게 제련된 庚金으로 수삭(修削)해야 한다. 窮通寶鑑의 용신(用神)은 오행의 역할에 따라 용신(用神)을 구(求)하고 그 용신(用神)은 세트로 짝을 지어 기능적 작용을 한다. 전체의 균형과 안정을 위 하여 필요한 각각의 기능을 상호의존적으로 수행하는 파슨스의 구조기능론과 부합된다. 즉, 甲木이 丁火로 인화(引火)하고, 인화(引火)된 丁火가 庚金을 제 련하고 제련된 庚金이 甲木을 벽갑(劈甲)하여 결실을 얻는다. 木生火, 火剋金, 金剋木의 생극제화 과정이다. 丁⋅庚⋅甲이 세트로 짝을 지어 임무를 수행하 는 상호기능적 관점의 용신(用神)특징을 갖고 있다.
『明心寶鑑』이 ‘고려말 조선초 이후 가정과 서당에서 아동들의 기본교재로 널리 쓰였다’(민족문화대백과사전)는 견해는 전문연구서를 비롯한 교양서 등에서 쉽게 확인된다. 그러나 『明心寶鑑』이 아동들의 초학교재로 사용된 구체적인 사례를 확 인하기는 쉽지 않다. 그 실상을 확인하고자 각종 문헌을 조사하였다. 18세기 이전에는 『명심보감』의 보급이 충분하게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특히 초 학자의 교재로 사용된 예는 확인하지 못했다. 다만 일부 자료를 통해 불교와 『명심보감』의 친밀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1850년 이후에는 일반인들이 『명심보감』 을 생활의 지침으로 삼거나, 어린 아이가 『명심보감』을 읽는 사례, 『명심보감』을 抄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그렇지만 許傳, 李源祚, 曺兢燮 등의 언술과 기타 자료를 종합할 때, 20세기 초 까지 『명심보감』이 아동들의 학습 교재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한 것으로 판단된다. 때문에 『명심보감』에 대한 현재의 열기에 대해 그 원인을 성찰할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Myeongsimbogam” is an aspect of the present during Yi Dynasty era. We think about Myeongsimbogam as the following. After a beginner learned the «Cheonjamun», they are following «Dongmongseonseup» and “Myeongsimbogam” for basic process was used widely like a textbook. At the end of the Goryeo era and early Yi Dynasty era, Myeongsimbogam had been used in the home and seodang. Later it was widely used as children’s primary textbook; people read hundreds of years while enjoying our nation's spiritual values, which play an important part in the formation. National culture, including the encyclopedia research book is almost identical. However, little data to support this view is not confirmed. Therefore, I researched the Josun Dynasty’s collections of work and several anthologies of literature by examining the articles associated with Myeongsimbogam. In the 18th century, the old data is part of Myeongsimbogam, which is shown in"(座隅自警语)". There were not enough readers, yet the readers ages were of the elderly. Monks studied Myeongsimbogam and in Ansimsa(安心寺) they published Myeongsimbogam. Buddhism showed a close relationship to Myeongsimbogam. Myeongsimbogam was published a couple of times, but was never very popular or used for children’s text books before the 18th century. After 1850 years reviewing the material, rather than professional scholars, writers and ordinary people read Myeongsimbogam as a guideline for their life, young children read Myeongsimbogamas a textbook. Nevertheless, scholars never really studied Myeongsimbogam. There was no information about scholars studying Myeongsimbogam. Myeongsimbogam may not have been important in our ancestors’ lives. Myeongsimbogam was not much of an important part in the seodang education.
이 글은 조선 헌종조에 편찬된 三朝寶鑑의 편찬 사례를 통하여 국조 보감의 편찬 과정과 편찬 의례에 대해 고찰한 것으로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국조보감의 편찬 과정은 찬집청이 설치되어 활동하는 시기와 감인청 이 설치되어 활동하는 두 시기로 나누어 살필 수 있다. 삼조보감을 편찬 할 때 찬집청은 대략 1년 6개월 동안 존속하였다. 찬집청에서는 우선 1차로 日省錄과 承政院日記를 통하여 보감의 내용에 적합한 기록을 발췌하여 찬집본을 만드는 일을 진행하였다. 찬집 작업은 정조보감부 터 시작해 순조보감과 익종보감의 차례로 진행하였고 찬집을 시작한지 8개월이 지난 무신년(1848) 11월에 이르러 완료되었다. 이후 교정 작 업은 교정 대신과 참정 대신으로 임명된 고위 관료에 의해 수행되었고 이는 정조 때의 관례를 따라 在家 작업으로 행해졌다. 삼조보감 편찬 때의 감인청은 찬집본이 완성되어 교정 작업을 진행 하는 중에 설치되었다. 삼조보감 편찬 때에는 감인청 설치 이후에도 찬집청이 한 동안 유지되었다. 이 시기 찬집청의 주요 업무는 삼조보감 찬집 초본의 교정에 관한 일이었지만, 한편으로는 御製 序文을 받아 이를 교열하는 일과 箋文과 跋文의 작성에 관한 일, 삼조보감의 속찬에 따른 국조보감 총목, 총서, 범례의 수정, 보완에 관한 일이었다. 삼조보감 편찬 때의 감인청은 무신년 2월에 설치되지만 인출 작업이 개시되는 것은 이로부터 6개월이 지난 뒤였다. 開印에 앞서 이루어진 감인청의 활동으로 중요한 것은 刊板 작업에 동원될 刻手를 확보하는 일이었으나 실제 각판 작업에 동원된 각수를 물색하게 되는 것은 印役 이 개시되는 일자에 거의 임박해서였다. 삼조보감의 刊板 작업에는 교 서관 소속의 각수와 외방에서 차출된 각수를 합쳐 도합 42명의 각수가 동원되었다. 이는 정조조 국조보감의 편찬 사업에 동원된 144명의 각 수와 비교할 때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이기는 하나 각수를 제외한 나머지 각색 공장의 수는 차이가 없는 것이었다. 감인청에서 주관한 삼조보감의 인역은 우선 활자판을 만들어 몇 건 의 활자본 삼조보감을 인출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이렇게 해서 인출 된 활자본 가운데 한 건은 각판용으로 사용하였고 한 건은 종묘에 봉안 하고 한 건은 왕에게 진상하였다. 보감은 다른 편찬물과는 달리 이를 종묘의 當室(해당 국왕의 廟室)에 봉안하였기 때문에 종묘 봉안건 보 감의 제작은 특히 중요하였다. 삼조보감의 경우 종묘에 봉안한 보감은 활판으로 인출한 3건 가운데 하나였다는 사실은 본 연구를 통해 처음으 로 밝혀진 것이다. 보감을 종묘 당실에 봉안하기 까지에는 새로 편찬된 보감을 국왕에 게 진헌하는 의식이 있고, 다음으로 종묘 봉안에 앞서 예정된 장소에 임시로 봉안하는 의식이 있으며, 그런 다음 마침내 종묘에 봉안하는 의식을 행하게 된다. 삼조보감의 편찬에 따른 의례적 행사에는 정조조 국조보감 편찬 때와 마찬가지로 모든 행사에 국왕이 친림하였다. 다만 정조조 국조보감 편찬 때와는 달리 삼조보감 편찬 때에는 보감을 왕에 게 진헌하는 행사장이었던 仁政殿을 임시 봉안처로 하게 됨에 따라 종묘 봉안을 앞두고 왕이 부근의 摛文院으로 이동하여 齋宿하는 절차 가 있었다. 또한 삼조에 대한 봉안 의례가 종묘 당실에 대해서만 행해졌 기 때문에 영녕전에 대해서는 전알례만을 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