履齋 宋鎬彦은 한말 경남 삼가군의 학자인데, 그는 南冥 曺植과 退溪 李滉에 대한 인식에 있어 매우 흥미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지역적으로는 남명의 고향과 같은 지역에 살았고, 학문적으로는 尹冑夏, 李震相, 郭鍾錫 등에게 배워 퇴계의 학맥에 닿아 있었다. 그의 문집에 보이는 남명과 퇴계의 인식에 있어 이러한 특성이 잘 반영되어 있는 작품들이 있는데, 특히 남명에 대해서는 남명 사상의 핵심이라 할 경의를 상징하는 敬義劍을 읊은 「南冥先生古劍歌」와 퇴계에 대해서는 한주 이진상이 부르짖은 祖雲憲陶가 새겨진 옥사자인을 읊은 「玉獅子印歌」를 들 수 있다. 두 작품 가운데 「남명선생고검가」는 경의검을 통해 남명의 사상을 읊은 것이고, 「옥사자인가」는 옥사자인을 통해 한주 이진상이 퇴계의 학맥을 계승한 것을 읊은 것으로, 바로 남명과 퇴계를 대비시켜 논한 것이 아니라서 두 작품이 긴밀한 연관성이 부족한 것은 사실이지만 「옥사자인가」에서 송호언의 퇴계에 대한 인식을 엿볼 수는 있다. 이재의 남명에 대한 생각은 남명의 제자들에 대한 시, 특히 삼가군수로 부임한 申斗善이 雷龍亭을 중수하면서 이재에게 명하여 지었던 「雷龍亭詩」에 잘 드러나 있다. 「뇌룡정시」에서 그는 인을 회복하여 乾道를 성실하게 하는 것은 군자가 바라는 것인데, 이를 실행하려면 용기가 있어야 하며, 남명이 바로 千仞壁 立의 기상을 가지고 하늘이 울어도 울지 않는 의연함이 있다고 칭송하였다. 「남명선생고검가」는 세 단락으로 이루어져 있는 장편 고시인데, 그는 첫 번째 단락에서는 역사가 깊은 칼을 남명이 지리산에서 갖고 있는데, 이는 하늘의 뜻 으로 없애고자 해도 없앨 수 없다는 것이다. 두 번째 단락에서는 남명이 그의 敬義劍을 가지고 세상의 일들을 처리하였다면, 온 세상이 밝고 정의로운 경과 의가 넘치는 세상이 되었을 것이라고 했다. 세 번째 단락에서는 남명은 결국 자신의 뜻을 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지니고 있던 칼이 남아 있으니, 후대 사람들은 경의 뜻을 담은 여덟 자의 내용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하였다. 이재의 퇴계에 대한 인식은 이재가 퇴계의 시에 차운한 3제 4수의 시에 잘 드러나 있다. 雙明軒의 차운시는 퇴계가 한 때 거처하던 장소에서 퇴계를 생각하고 그 서글픈 심회를 노래한 것이고, 四樂亭 차운시는 사락정의 모습과 그곳에 깃들어 있는 퇴계의 자취를 읊었는데, 퇴계를 사모하여 도의 眞諦를 그에게 묻고자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없는 현실을 노래한 것이다. 특히 「옥사자인가」는 「남명선생고검가」와 마찬가지로 세 단락으로 이루어져 있는 장편 고시인데, 그는 첫 번째 단락에서는 주자의 학문이 퇴계로 이어진 것을 寒洲 李震相이 계승하였음을 여러 고사와 비유적인 내용을 통하여 드러내어 주었다. 두 번째 단락에서는 사자를 그려 자신의 학문을 전하였기에 사자가 있는 곳이 스승이 있는 곳이 되었지만, 꼭 그것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밝혔다. 세 번째 단락에서는 후학들에게 해야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을 경계하는 내용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퇴계에 대해서는 남명에 대한 것만큼 현실적 실천의 잣대로 평가하지 않고 다만 후대의 학자가 부르짖는 ‘祖雲憲陶’의 주체로서 주자로부터 조선후기 이진상에게 이르기까지 그 학문의 정맥이 이어지고 있음을 말하였다.
본고는 호남출신의 문인 頤齋 黃胤錫(1729∼1791)이 아내와 小室에 대해 남 긴 기록을 통해 그가 자신의 배우자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어떻게 애정을 표현했는지 그의 한시를 중심으로 살펴봄으로써 당시 鄕儒가 가졌던 배 우자에 대한 의식의 일면을 알아보려 한다.
본고는 그의 시 중에서 특히 아내와 소실을 대상으로 지은 작품에 주목했다. 이재는 20세에 남원에 살던 창원 정씨와 혼례를 올렸는데 24세부터 과거와 학 업을 위해 아내와 떨어져 지냈고, 38세에 음보로 장릉 참봉의 일을 하게 되면서 부터는 더욱 긴 시간 동안 집안일은 아내에게 맡긴 채 객지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때문에 가까이에서 부모님을 모시지 못하는 아쉬움과 어린 자식들이 커나가 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지 못하는 서글픔 등과 함께 이 모든 가정사를 홀로 도 맡아 책임지고 있는 아내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이 그가 남긴 일기의 곳곳에 서 드러난다.
특히 아내는 일상적인 가정사 이외에도 이재가 객지에 머무는 동안 출산이나 死産·어린 자식의 夭折 등 큰 어려움들을 홀로 견뎌내야 했다. 이처럼 아내는 홀로 고생만 하다가 48세의 나이로 먼저 세상을 떠났고 따라서 이재가 현감이 되었을 때는 정작 그 영광을 함께 누릴 수 없었다. 이재는 이점을 무엇보다도 아쉬워했고 그래서 아내가 세상을 떠난 뒤 아내의 생일이나 기일이 되면 지난 날을 회상하며 그녀를 추모하곤 했다.
남자가 홀로 객지 생활을 하기에는 불편한 점이 많았기에 장릉 참봉 시절부터 주위 사람들은 이재에게 첩을 들여 의식주를 돌보게 하는 것을 권유했고 이재 역시 첩을 들이는 것을 염두에 두기는 했다. 하지만 가족들과의 관계나 경제적 인 문제 때문에 차일피일 미루다가 아내가 세상을 떠나고 喪期를 마친 뒤에야 小室을 맞이하게 되었다.
하지만 小室은 황윤석과 함께 머무는 것이 아니라 고향의 집에 머물며 며느리 의 빈자리를 대신해야 했으므로 이재는 여전히 홀로 객지에서 벼슬살이를 할 수 밖에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소실을 들인 2년 뒤에 목천현감이 되어 어머니· 자식들과 함께 소실도 목천현에서 함께 기거하게 되었지만, 이 무렵 소실은 병 이 들어 현감생활 내내 치료를 받아야 하는 처지였다.
이재는 소실의 병에 대해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면서 의원을 초빙하고 탕약 을 제공하며 성심껏 소실을 보살폈고 소실 역시 병중에서도 안주인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목천현에서 파직되고 수년 간 고향에 머 물다가 다시 전의현감에 오르고 이듬해 최종적으로 벼슬을 떠나 고향에 머무를 때까지 소실은 이재의 곁에서 아내의 역할을 충실하게 해주었고 이런 소실에 대해 이재는 고마운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최근 발생한 천안함 피격과 연평도 포격사건과 같이 남북한 전쟁에 대한 위기감이 확산됨에 따라 전쟁이 발발할 경우 국민들이 일정기간 동안 안전하게 거주할 수 있는 임시거주공간 확보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지하철 역사는 민방위기본법에 의해 폭격에 대한 방호기능을 갖춘 2등급시설로서 대규모 이재민을 수용하기 위한 임시거주공간으로 충분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하지만 현재 민방위기본법에는 지하철을 대피시설로 활용할 경우 4인당 3.3㎡를 확보하도록 최소 기준만을 설정해 줄 뿐 전쟁 장기화시 임시거주공간으로 활용하기 위해 세부사항에 대한 기준은 없다. 뿐만 아니라 소방방재청의 재해구호계획 수립지침에서도 풍수해대비나 지진에 대비한 임시거주공간에 대한 기준은 있으나 전쟁에 대응한 지하 임시거주공간에 대한 기준은 없는 상황이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연평도 포격 이재민을 대상으로 연평도 포격당시 대피소의 문제점과 지하 임시대피공간에 대한 요구도 설문조사를 통해 향후 전쟁대응 지하 임시거주공간에 대한 기준을 마련하기 위한 기초연구로 활용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