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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8.03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글은 제1차 진주성전투에 있어서 경상우도관찰사 김성일의 역할을 구명하기 위한 논고이다. 주지하다시피, 진주성전투는 진주목사 김시민 등이 혈투를 전개하여 진주성을 지켰던 승첩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때 김성일은 경상우도관찰사로사 김시민 등을 지휘하여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초유사로 활동하던 김성일은 경상좌도 관찰사에 임명되어 초유사직에 물러나 잠시 경상우도를 떠났다가 다시 경상우도관찰사로 부임하였다. 그 사이에 개령, 성주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이 거창 방면을 위협하고 있는 가운데, 부산 창원 방면으로부터 일본군이 진주성을 공격해 왔다. 경상우도 관찰사로 부임한 김성일은 최고의 지휘관으로서 탁월한 역량과 전술운용으로 진주성을 지키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김성일은 진주목사 김시민 등을 주축으로 관군 중심의 수성체계를 구축하고, 진주성 외곽에 관군과 의병을 배치하여 구원하게 함으로써 진주성을 공격하도록하는 전략을 운영하여 진주성 방어력을 강화함은 물론, 분산전을 유도하여 일본군의 진주성 공격의 전력을 약화시켜 진주 수성군의 부담을 덜어 주었다. 아울러 포위된 진주성에 화살 등의 물자를 공급하여 줌으로써 전투력을 유지하고 군사의 사기를 높여주었다. 진주성 전투 직후 그는 거창 방면으로 쳐들어 오는 일본군에 대응하기 위하여 삼가로 달려가, 주변 지역의 관군을 거느리고 의병장 김면, 정인홍 등을 도와 이를 막아내었다. 이후 의병장 김면, 정인홍 등은 전라도 의병장인 최경회 임계영 등이 성주, 개령 지역의 일본군을 지속적으로 공격하여, 마침내대 다음해 2월 성주, 개령지역을 수복하였는데, 여기에도 관찰사로서 김성일의 역할이 크게 작용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결론적으로 진주성전투의 승리는 경상우도의 최고 지휘관이었던 김성일의 전략과 진주성의 수성장이었던 김시민의 절묘한 전술운용, 그리고 각 전투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전투를 수행했던 제장과 사졸의 분전이 어우러진 값진 결과였다. 진주성 전투에서의 승리는 진주성을 지킴으로써 수만의 성내 관민의 목숨을 구한 것은 물론이고, 경상우도가 일본군의 수중에 들어가지 않게 하였으며, 나아가 일본군이 호남으로 진출할 수 있는 길목을 차단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2.
        2014.03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논문은 慶尙右道 義兵 봉기의 배경, 金誠一이 작성한 招諭文의 역사적 특징, 招諭 활동의 정치적 함의와 기여를 중앙과 지방의 갈등이라는 거시적 관점에서 재고찰한 연구이다. 그 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임진왜란 初戰의 무력한 패배를 초래하는 데 일조한 경상도 지역 민 심 이반의 근본적 원인은 수령들의 무능과 비겁 때문이라기보다는 전쟁 이 전 적극적 군비 확충을 시도한 중앙 朝廷에 대한 지역민의 반발 때문이었다. 초반 전황이 극도로 불리한 상황 속에서 조정은 탄탄한 지역 기반을 가진 재 지 사족층(在地士族層)에게 손을 내밀지 않을 수 없었다. 역설적이었던 것 은, 조정이 적극적으로 활용하려고 한 경상도 재지 사족층의 잠재력에는 그 들이 불법으로 탈점한 토지, 노비로 위장하여 거느린 농민, 마땅히 수행해야 할 軍役을 회피하는 데 성공한 사족 일부가 포함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이러 한 것들은 임진왜란 敗因의 하나로 흔히 언급되는 軍政 문란을 포함한 失政 의 결과물이었다. 둘째, 김성일의 초유문은 지역민을 결집하고 의병 활동을 장려하기 위한 목적으로 작성되었다. 따라서 초유의 대상인 경상도 지역의 士와 民을 가장 적절하게 설득하기 위한 논리와 내용으로 구성되었는데, 여기에는 階序的 신분 구조와 華夷觀과 같은 당대인들의 특징적인 心性이 반영되어 있었다. 초유문은 크게 보아 義理와 利害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지역민을 설득하고 자 하였다. 셋째, 중앙 조정은 안동 출신의 명망 있는 前職 高官이자 南冥學派와 긴밀 한 유대가 있는 김성일에게 招諭使의 職名을 제수하여 경상우도에 파견하였 다. 김성일은 의병의 봉기를 장려·보장함으로써 武裝 起義할 경우 반란 세력 으로 오인 받을 수 있다는 재지 사족의 우려를 拂拭시켰고, 도주·관망 상태 에 있던 지방관과 지역민을 결집하여 저항의 장으로 이끌어 내는 데 성공하 였다. 나아가, 그는 전쟁 발발 이전부터 누적된 갈등의 연장선상에 있던 관 군과 의병의 충돌을 적절히 타협·조정하였다. 경상우도 의병의 봉기는 지역 의 방어뿐만 아니라, 이반된 민심을 돌이키는 데 성공함으로써 일본군의 宣撫 공작과 원활한 현지 조달을 저지하는 데 기여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 를 갖는다
        3.
        2010.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趙性家와 崔琡民은 경상우도 蘆沙學派의 핵심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南冥學派의 본거지인 경상우도에서 태어나 蘆沙 奇正鎭의 문인이 되었고, 기정 진의 학문을 전파하고 확장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사람들이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이들의 행적을 돌이켜보면 그들에게서 남명학적 사상과 언행을 적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이들의 이러한 언행을 순 수하게 보지 않고 있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다. 그 이유는 그들의 이러한 행위 가 진정으로 남명학을 존숭해서가 아니라, 남명학적 사상이 뿌리 깊게 자리 잡 은 경상우도에서 자신들의 학파세력을 확산하기 위해서는 의도적으로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기록에 남아있는 여러 가지 증거와 정황으로 볼 때, 경상우도 노사 학파를 대표한다 할 수 있는 조성가와 최숙민은 실제로 남명 조식을 존숭하였 고 그의 사상을 자신의 내면에 깊이 간직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사상을 더욱 더 발전․확산시키기 위해 다방면에 걸쳐 노력했던 인물들이었다는 것도 분 명하게 드러나고 있다는 점에서 남명학 존숭과 관련된 그들의 언행은 진정성에 바탕을 둔 것으로 인식해야 한다.
        4.
        2010.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고는 19세기 경상우도 학풍 속에서 趙性家(1824-1903)와 崔琡民(1837- 1905)의 활동을 분석하여 노사학이 어떻게 전개되어갔는가를 살펴본 것이다. 경상우도 지역은 19세기에 새로운 성관집단이 성장하면서 학파를 비교적 자유 롭게 선택할 수 있었고, 각 가문에서는 과거 급제나 학행에 뛰어난 인물 배출을 위해 노력한 결과 진주 일대의 학문 수준은 그 이전시기보다 훨씬 높아지는 결 과를 갖게 되었다. 각 가문에서는 書齋를 지어 학문에 몰두하였으며, 지리산과 덕천강의 풍경이 뛰어난 곳에는 樓亭을 지어 문장을 통해 당색을 뛰어넘어 교제하였다. 문장 외 에도 경학이나 성리학에 뜻을 둔 학자들은 호남의 기정진과 같은 저명한 학자 들에게 나아가 수학하였다. 경상우도의 기정진의 문인들은 섬진강과 지리산을 따라 이어진 길을 따라 호남으로 나아갔는데, 곳곳에 숙박할 수 있는 객점과 시 문을 주고받을 수 있는 사족들이 분포되어 있어서 여행이 용이하였다. 또한 장 성의 김인후나 함양의 정여창의 후손 등 영,호남을 대표하는 사족들 간에 혼인 도 이루어지고 있어서 호남 지역을 왕래하는데 정서적으로 큰 어려움이 없었 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기정진의 명성이 높아지자 많은 학자들이 기정진을 찾 아와서 수학하게 된 것이다. 조성가와 최숙민은 19세기에 성장한 가문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경상우도에 서 두각을 나타낸 인물들이다. 그들은 河達弘(1809-1877)등에 의해 전개된 시 단에 참여하여 다수의 시를 남겼으며, 장성의 기정진을 찾아가서 주리론에 바 탕을 둔 성리학에 잠심하였다. 조성가는 호남지역 문인들과 깊은 관계를 맺고 하달홍 이후 이 지역의 시단을 이끌었으며 영, 호남간의 노사학파의 가교 역할 을 하였다. 그는 崔益鉉이나 宋秉璿, 李震相 등이 찾아올 정도로 명망이 높았으 며, 관찰사나 목사 등 지방관과 함께 향약을 실시하여 향촌질서를 수립하고자 하였다. 또한 남계서원의 원장이 되어 강규를 새롭게 정하거나 조식의 신도비 의 일에 주도적으로 관여하였다. 또한 최숙민은 남인 출신이지만 기정진에게 수학한 인물로서 이항로나 이진 상의 문인들과도 교제하면서 기정진의 학설을 심즉리로 이해하였다. 그는 기정 진에게서 성리학을 수학한 이후 동문들과 강회를 자주 개최하였으며, 조식을 숭상하여 山川齋에서 德山講約의 강규를 정하는 등 강학에 힘써 산청과 단성, 진주 일대에 다수의 문인을 배출하였다. 그의 학문은 기정진의 학설을 추종하 여 매사에 천명 즉 천리를 구현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삼강오륜의 도덕적 질서 를 중시하고, 의리나 도리에 어긋나는 일체 행동을 배격하고자 하였다. 이 때문 에 그는 1895년 단발령이 내리자 도에 어긋난다고 반발하여 직접 언문을 지어 단성의 吏民들을 효유하여 결국 단발령을 철회하게 하였다. 이처럼 조성가와 최숙민은 각각 이 지역의 문단과 학계를 주도하면서 경상 우 도 지역에 의리에 바탕을 둔 노사학파의 학설이 굳게 뿌리내리게 하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