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논문은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의 학문에 대한 새로운 연구관 점의 필요성, 그의 처사적 삶의 진정한 의미, 그리고 경의(敬義)정신과 사회적 실천방법을 연구하였다. 그 결과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남명의 학문은 이황(李滉. 1501~1570)과 이이(李珥. 1536~1584)를 중심으로 하는 주리(主理)와 주기(主氣), 기호학파(畿湖學派)와 영남학파(嶺南 學派)와 같은 이분법적 연구를 지양해야 한다. 이러한 이분법적 연구는 일제의 어용학자인 Takahashi Toru(高橋亨.1878~1967)가 남긴 일제(日帝)의 잔재 (殘滓)이기 때문이다. 둘째, 처사(處士)로서 남명은 학문적으로 이단(異端)을 구분하지 않았다. 그 는 늘 불의에 항거하고, 무능한 왕과 그의 어머니가 수렴청정(垂簾聽政)하고, 척신(戚臣)들이 권력을 농단하는 조정에는 출사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늘 국정 에 관심을 가지고 다양한 시무책을 제시하였고, 다양한 문인을 교육하고 교유 하면서 장차 다가올 국난을 대비하였다. 셋째, 그는 국가의 안위와 민생을 위해 늘 국정의 혁신을 주창하였다. 특히 남 명은 최고통치자인 왕의 진정한 희생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사상은 그가 그린 「신명사도(神明舍圖)」에 잘 나타난다. 종합하면, 남명의 사상에는 근대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그는 무실(務實)을 강조하고 적극적으로 실천하였다. 그는 당리당략이나 특정 학문을 고집하지 않 았고, 연구와 실천에서 항상 객관적·합리적 태도를 중시하였다. 이러한 남명의 학문과 사상은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남명의 학문과 삶에서 현대의 한국병을 고칠 수 있는 방향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The article aims to compare the thought and practice between Nammyeong Jo Sik(1501-1572), the Confucian scholar of the mid Choso˘n period and Yamazaki Ansai(1618-1682), the Confucian scholar of the early Tokugawa Japan. Most of the comparative studies are conducted to highlight the differences between the cases compared. People, for example, will expect from the comparative study of Nammyeong and Ansai's thoughts to see the differences of reception and development of the Neo-Confucian thought in Choso˘n and Tokugawa Japan. This article, however, focuses on the commonalities and similarities shared by the two Neo-Confucians who lived in the totally different political systems and backgrounds. Both of them concentrated not on how to philosophize their own thinking but on ways to actualize the truths revealed by their antecedents. Their lives, therefore, were consistent in practising the truths discovered by the sages. Their concrete methods of practice were Jing(敬) and Yi(義). The two thinkers actualized their beliefs: Nammyeong as Chushi(處士) in times of the massacre of literati in mid Choso˘n period, and Yamazaki Ansai as Binshi(賓帥) in the barrack state, a counry unfamiliar with Neo-Confucianism. They shared the common dreams of being the Wangshi(王帥) and truly corresponded to Chu Hsi(朱熹)'s idea of the citizen of the cosmopolitan worl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