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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9.06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서예는 문자를 매개로 하여 자신의 성정을 나타내는 특수한 예술이다. 논서시는 내용 전달에서 서예를 주제로 삼아 시의 형식을 빌려 서예를 논한 것을 일컫는다. 이는 서예의 명칭․원류․도리․서예가․서예작 품․서예사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이를 또한 운문 형식의 시로 표현 하였기 때문에 산문형식의 서예이론에 비해 상징적․추상적․은유적 성격이 강하면서도 완곡한 의미를 함유하고 있다. 한국의 논서시는 신라 최치원이 효시를 이룬 뒤 고려 문인들이 한국과 중국의 서예와 관련된 내용들을 다각도로 작시(作詩)하였다. 조선시대의 서예개황은 고려말기 만권당을 통해 송설체가 유입된 이후 조선 초기 송설체의 대가 이용이 나왔고, 중기에 들어와 김구의 인수체(仁壽體)와 성수침의 청송체(聽松體)로 이어졌다가, 마침내 한호의 석봉체(石峯體)가 완성되었다. 조선시대의 논서시에서 초기를 대표하는 이용은 필법․자태․근골․정신이 뛰어났다. 그러나 송설체는 말류의 폐단을 나타내자, 성리학자들은 논서시를 통해 이를 걱정하며, 서예의 근본을 추구하는 경향을 나타내었다. 중기에서 자주의식을 갖추고 조선 미감을 대표하는 한호에 대해 송설체를 벗어나, 왕희지를 추구하는 논서시들이 나타났다. 후기의 이광사는 논서시를 통해 왕희지체를 전범으로 삼은 바탕에서, 조선 서예의 토착화를 모색하였다. 말기를 대표하는 김정희의 공허한 성리학보다는, 실사구시의 금석고증학을 기반으로 한 북학을 학문과 예술로 승화시켰다. 이러한 조선시대 논서시의 특징은, 조선 서예사의 반영, 조선인의 예술적 정감을 표현, 시대마다의 서예 비평 등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서예를 논한 운문의 논서시는, 논리의 체계를 갖추고 의미를 전달한다는 면에서, 비록 형식의 서사시로 쓴 서론 보다는 미흡하지만, 표상적이며 최상인 문인서예에 더욱 걸맞은 것이라 하겠다. 연구를 폭 넓게 확대하여 논 서시에 대한 관심을 갖는다면, 문인서예발전에 이바지 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서예 창작에 많은 도움을 주어 서예에 건실한 표석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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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8.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서예는 문자를 매개로 하여 자신의 성정을 나타내는 특수한 예술이다. 따라서 서예는 문자를 떠날 수 없고, 이를 서사하는 것과 내용 전달이라는 두 가지 효능을 갖추고 있다. 내용 전달에서 서예를 주제로 삼아 시의 형식으로 표현한 것을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 시는 절제된 언어, 서예는 문자를 빌려 사상과 정감을 나타낸다. 논서시는 시와 서예의 발생과 형성과정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지금까지 작가의 이름이 기록된 최초의 서론은 최원의 『초서세』이고, 이는 『시경』과 같은 사언시로 썼기 때문에 논서시의 원류로 삼을 수 있다. 시는 한나라의 賦, 위ㆍ진나라의 行, 당나라의 근체시에 이르러 비로소 완전한 체제가 완비 되었다. 논서시의 발생과 형성과정은 이와 맥락을 같이 하였다. 즉 한나라 최원의 『초서세』는 논서시의 발생과 원류, 위ㆍ진나라 조식의 「장가행」은 형성과정의 대표작품, 당나라 논서시는 체제의 완성이라 하겠다. 최원의 『초서세』는 사언시의 형식을 빌려 서예의 기원과 초서의 발생 ㆍ법도ㆍ효능ㆍ심미ㆍ감상 등을 언급한 최초의 논서시이기 때문에 이를 논서시의 발생과 원류로 삼기에 충분하다. 조식의 「장가행」은 당시 유행하였던 行의 시 형식으로 문자의 생성과 서사 재료를 논하였다. 논서시의 체제가 완비된 당나라에서는 서체ㆍ서예가ㆍ서예작품에 대한 것 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이에 대한 연구는 비록 논서시의 발생과 형성과 정이지만, 이를 근원으로 폭 넓게 확대하여서. 연구한다면 문인서예와 나아가 새로운 서예 창작에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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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13.08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한자의 역사에 있어서 詩와 書의 관계는 매우 깊고 유구하다. 시는 그 사람이 가지는 當時의 가장 주요한 생각을 문학적으로 표현한 것 이고, 書는 그것을 다른 사람들이 읽을 수 있게 하는 하나의 장치였 다. 어떤 일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보다 아름다운 언어로 표현하고자 하는 詩와 그것을 보다 아름다운 글씨로 표현하려는 書藝와의 관계는 漢字가 생긴 이래로 오래도록 이루어져 왔던 일상의 일이었다. 본고 에서는 이러한 논서시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라는 문제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現傳하는 문헌 중 서예를 주제나 소재로 한 韻文인 詩 가운데 어 는 것을 논서시의 濫觴으로 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그 고려대상 으로 삼은 것은, 武王(?~B․C 1043)의 「筆名」․「書硯」과 崔瑗 (77~142)의 「草書勢」와 曹植(192 ~232)의 「長歌行」 네 작품이다. 금번의 고찰은 여기에서 소개하는 하나하나의 시들이 가지는 의미 나 작가들이 가지고 있던 미학사상을 밝히기 보다는, 詩와 書와의 관 계가 그 작자 자신들의 詩속에 언제 어떻게 반영되고 있었는가를 살 피는 작업이었다. 이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周 武王의 「筆名」과 「書硯」은 고인들의 서사 용구에 관한 관심을 잘 반영해 주고 있는 작품이다. 그것들은 내용상으로 후대의 논서시 와는 다소 거리가 있지만 붓과 벼루를 읊은 최초의 시라는 점에 의의 가 있고, 특히 御定佩文齋詠物詩에는 「硯類」, 「筆類」라는 書畫에 관련된 편 속에 실려 있어서, 적어도 淸나라 康熙帝 때의 문인들은 이 시들을 문방사우를 소재로 한 시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에 유의 해야 한다. 때문에 당연히 이 시들을 논서시 목록에 넣어 후대 논서 시들이 전개되는 단초로 삼아야 할 것이다. 崔瑗의 「草書勢」는 살펴본 바와 같이 押韻法이나 구성법 상 완벽한 漢賦에 해당된다. 운문의 한 갈래인 賦는 漢代의 주요한 문학적 표현 수단이었으므로, 이 또한 당연히 논서시 목록에 넣어야 할 것이 다. 東漢이후 5言과 7言詩가 많이 쓰이는 때와는 상황이 다르며, 더 군다나 후대에 지어진 산문에 가까운 文賦들과는 다른 문제인 것이 다. 이 작품은 내용 면에 있어서도 문자의 발생과 초서로의 변천 및 초서의 필법과 필세를 완벽하게 표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서 단의 상황과 작가의 미학사상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때문에 논서시 의 범위를 후대에 많이 지어진 5言과 7言의 시로 한정하지 않은 이상 당연히 논서시로 보아야 할 것이다. 현재 논서시 연구자들은 曹植의 「長歌行」을 본격적인 논서시의 출 발로 삼고 있다. 후대의 대부분의 논서시들의 형식인 5언과 7언과 같 은 형식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논서시의 범위를 여기까지 만으로 한 정해서는 안 될 것이다. 東漢과 魏晉南北朝時代에 지어진 여러 賦들 도 운문이기 때문에 논서시 범위에 넣어 연구를 더욱 심화할 필요성 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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