玉洞 李漵(1662-1723)는 평생 학문과 예술로 살다간 近畿南人 실학자였다. 그의 가문은 李繼孫에 이르러 문학으로 起家하였고, 증조 李尙毅 대를 거치면서 문벌가문으로 성장하였고, 영조 이후로는 이서 형제의 학인들을 중심으로 실학사상을 형성․발전시킨 유서 깊은 가문 이다. 먼저 이서 학문정신의 가학적 연원을 살펴보면, 증조 李尙毅는 中 正과 自得을, 조부 李志安은 『大學』과『中庸』을, 부친 李夏鎭은 敬의 수양태도, 博學의 추구, 聖經의 객관적 수용 등을 강조하였는데, 中正의 정신, 自得의 정신, 誠敬의 수양, 독서를 통한 다양한 분야의 관심은 이서 학예정신의 근간을 이루는 것들이다. 이서가 가르침을 받은 중형 李潛은 自得을 중시하였으나 『弘道遺稿』에 나타나 있는 이서의 학문은 철저한 성리학자의 면모이다. 이서 예술정신의 가학적 연원을 살펴보면, 증조는 道本文末적 사유를 견지하였으나 서예로 이 름이 있었고, 從祖 李志定은 조선중기를 대표하는 초서의 대가로 그 의 시는 仙趣가 있다. 그의 서예는 從姪 李夏鎭과 從孫 李漵형제에게 가전되었다. 부친은 唐宋古文과 中唐의 詩를 지향하고, 서예는 鍾繇 와 王羲之를 추구하였다. 이서의 가학연원과 관련하여 선조들의 使行 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특히 부친이 중국에서 가져온 다량의 장서 와 서화는 이서의 서예성취와 서학형성에 큰 바탕이 되었다. 요컨대 이서가문은 어려서부터 가학으로 六藝를 익히고 이를 기반으로 자신 들의 세계를 구축하였다. 대대로 수양과 실천을 중시한 생활태도, 독 서를 통한 박학적 학문태도, 詩書를 위주로 하는 예술관은 이들의 공 통된 경향이다. 이서는 이전까지 문학으로 성가하였던 집안을 경학으로 전환하고, 다양한 관심 분야와의 유기적 결합이나 새롭게 접하는 분야를 發明함 에 있어 절대적 가치기준으로 삼았다. 그의 이러한 학예정신은 분명 선대의 가르침인 자득정신과 성경사상의 실천적 측면이 어느 정도 작 용하였다고 볼 수 있겠다. 그렇지만, 자신이 새롭게 발명함으로써 가 학의 새로운 전통을 열었다고 하겠다.
본고는 林養正(1716-1777)의 문집인 『수분와집』을 텍스트로 하여, 그의 생애와 가학을 계승하고 실천한 양상을 살피는 데 목적이 있다. 『守分窩集』은 별도의 목차 없이 그의 지향을 밝힌 문장인 「守分窩 序」와 관련 기록 부분, 시편과 간찰을 모아놓은 부분, 家狀 관련 부분 등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임양정은 남명학파의 학자였던 임진부(1586-1658)의 후손으로, 三嘉 지역의 학풍을 이끌어나가는 지역 명문가 출신이다. 어린 나이에 부친과 조부를 여의었으나 평생 충과 효를 실천하는 삶을 살았고, 가학 을 잇는 것을 본연의 임무로 받아들였다. 이는 성현이 남긴 文義를 명확히 이해하는 것으로, 이를 후학에게 자신이 터득한 문의를 정확히 전수 하는 방식으로 실현되었다. 아울러 가학의 전수는 임진부의『禮略』을 실천하여 誠禮의 정신을 체득하는 것으로 실현되었다. 이를 실질적으로 적용시켜 선조의 가훈을 誠孝와 公正이라는 정신으로 확립시켰다. 임양정의『수분와집』은 남명학파의 한 지파인 임곡 임진부의 후손이 향촌의 명문가로 자리 잡으면서 선조의 가훈을 어떻게 현실에서 구현시켰고 윤리규범으로 작용하였는가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