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명석의 이름은 세 가지로 성도, 명석, 문석이었는데, 공적인문서와 저 술활동에서는 ‘강명석’으로 사용하였다. 교적도 셋으로 장로교회에서 신 앙생활을 출발하여 감리교회서 목사가 되었고 문필가로 활동하였으며, 그 리스도의 교회로 옮겨 회복운동을 한국교회에 소개하였다. 그는 일본과 미국에서 신학을 공부한 유학파 출신으로, 미국유학 당시 처음에는 강제 송환을 당하였지만 두 번째에 뜻을 이룰 정도로 의지력이 강했다. 그러나 회복운동가가 되어 귀국한 후 바울을 닮으려는 심정으로 최선을 다하던 어느 날 모함을 받고 모함하는 자로 인해 쓰러져 눕고 말았다. 그는 분쟁 과 분열을 싫어하였기에 혼자서 하나님께만 그 아픔을 호소하며 4년을 누 워 지내다 44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하므로 자기희생을 통한 용서를 가르 쳐 주었다. 강명석은 한국교회사에 기독교사회주의자, 문필가로는 알려져 있지만,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초기지도자이며 한국에 회복운동을 소개한 선구자 로는 별로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래서 본 연구는 강명석을 한국교회사 속 의 회복운동가로 소개하고, 아직도 생소하게 느껴지는 회복운동을 한국교 회에 소개할 의도를 가지고 연구하였다. 특히 그의 회복운동 사상은 문필 가답게 그가 남긴 유산인 그의 글을 중심으로 소개할 것이다. 그가 펼친 회복운동은 ‘성서로 돌아가자’, ‘원시교회로 돌아가자’, ‘하나님께로 돌아가 자’, ‘하나의 교회로 일치하자는 운동’이었다. 그러므로 세속교회와 전자식 교회, 프로그램중심교회가 생겨나고 수많은 교파로 분열되어 있는 한국교 회에 회복운동의 사상은 교회개혁(교회갱신)과 교회일치의 방안이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강명석의 인생에서 큰 전환점이 되었던 것은 2차례 해외 유학이었다. 첫번째 전환점은 1920년대 중반 그는 일본 칸사이학원 신학부에서 공부하였다. 자유로운 신학 분위기 속에서 그는 기독교 사회사상을 접하였다. 일본 유학시절 그는 비참한 민족 현실을 이해하였고, 한센병자들의 고통을 체험하며 목회의 길을 준비하였다.
일본 유학이후, 강명석은 반기독교운동에 대해 대응하는 한편, 현실과 거리를 두고 있는 교회와 교인들을 비판하였다. 그는 교회가 사회를 구원하기 위해 사회 현실의 이해와 사회사상의 수용이 필요하다고 인식하였다. 그는 사회사상의 역사적 변천과 성경 속에서 담긴 의미 등을 검토하여 한국기독교의 사회적 역할을 강조하였다.
두 번째 전환점은 1930년대 초 미국 밴더빌트 대학교의 유학이었다. 미국 유학과정에서 그는 <그리스도의 교회>의 환원사상을 접하였다. 환원사 상은 교회의 일치를 표방하며, ‘성서로 돌아가자’, ‘초대교회로 돌아가자’ 는 핵심 내용이었다. 그는 환원사상을 한국교회의 내분과 갈등, 충돌을 넘어서 이 땅 위에 참된 교회를 세우는 개혁사상으로 이해하였다. 이를 통한 교회의 일치는 한국교회의 개혁 방향이란 확신을 갖게 되었다.
이런 이유에서 강명석은 졸업직후 감리교에서 <그리스도의 교회>로 환원하였다. 그는 귀국 이후 <그리스도의 교회>를 본격 소개하며 환원운동의 선구자로 그리스도의 교회를 한국 땅에 세우기 위해 열정적인 활동을 하였다. 비록 환원사상이 보수적 신학으로 평가받음에도 불구하고, 강명석은 한국교회의 내분과 갈등, 충돌을 넘어서 교회의 일치를 지향하며 이 땅 위에 참된 교회를 세우는 개혁사상으로 변용하여 받아들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