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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글은 19세기 후반-20세기 초 江右 지역에 유행처럼 일었던 존주의식 현양 활동을 중심으로 강우지식인의 의식세계를 살펴 본 것이다. 존주의식은 임진란 이후부터 중앙정계를 중심으로 지속되었던 지성사의 한 중심축이었다. 시대가 흐를수록 이에 매몰되어 근대의 문턱을 넘지 못한 족쇄였다는 지적도 있었지만, 19세기까지도 조선사회의 주류를 차지하였다. 중앙을 중심으로 진행되던 존주의식 현양 활동이 지방에 끼친 영향의 상관성 연구가 전무했었는데, 본고가 강우지역의 세 사례를 통해 살펴보았다. 이 시기 강우지역에는 수많은 학자가 활동하였고, 그들은 여전히 명나라 毅宗의 ‘崇禎’ 연호를 사용하고 있었다. 이러한 단편적인 현상만으로도 시대를 제대로 읽지 못한 전근대적 사고라 비판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삼전도 치욕 이후 형성된 북벌론 또는 대명의리가 시대의 흐름에 맞춰 당대의 시대논리로 변모해 왔듯, 이 시기 강우지식인들도 자기 시대의 논리에 맞게 이를 받아들였을 뿐이었다. 예컨대 남평문씨 가문의 大明花 현양과 朴震英 추숭으로 인해 강우지역에 일었던 존주의식 현창 활동은, 오랜 기간 소외되어 있던 지방사족이 顯祖를 선양하고 가문의 위상을 강화하려는 절박함에 의해 도출된 그들 나름의 명분이었다. 鄭蘊과 朴明榑를 통해 某里나 弄月亭에서 갈구했던 지식인의 自意識 또한 그 시대가 낳은 역사적 산물이었다. 한말에 몰아닥친 외세의 침략과 일제의 야욕, 이로 인해 해체되어 가는 전통유학의 봉건적 질서 등 내우외환의 위기감이 고조되던 이 시기에 정온 등의 춘추대의 정신이 대안으로 떠올랐던 것이다. 강우지역의 존주의식 현창 양상은 강우학자들이 당대 지식인으로서 자기 시대를 헤쳐 나가는 최선의 선택이자 기회였던 것이다.
        2.
        2010.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神明舍圖」와 「神明舍銘」은 南冥 曺植의 학문적 특징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것으로, 南冥學의 핵심 사상이 담겨 있는 圖說이다. 그런데 后山 許愈가 「神明 舍圖銘或問」을 지어 이것에 관한 해석 작업을 시도하기 이전까지 300년 동안 은 어느 누구도 그 내용과 의미를 밝히려고 하지 않았다. 后山은 「神明舍圖銘或問」을 지어 南冥의 「神明舍圖銘」을 상세히 해석하고 그 것이 가지는 유학사적 의미를 밝히고자 하였다. 그는 「神明舍圖銘」에 南冥의 心學이 오롯이 담겨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南冥의 「神明舍圖銘」에 대한 주해 작업을 경상우도 학자들의 공적 안건으로 발의함으로써, 南冥의 학문과 수양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南冥學의 요체를 분명하게 파악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므로 「神明舍圖銘或問」은 后山의 개인적 저술이라는 의미를 넘어, 당시 慶 尙右道의 학자들이 학문적인 측면에서 본격적으로 남명학을 조명하는 촉발점 이 되었으며, 그 작업에 그들의 학문적 역량을 집결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 였다.
        3.
        2001.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This study examins the prestigious scholarship genealogy and trend of scholars who lived in the right side of Kyungsang province in the 19th century. In the right side region of Kyungsang province in 19th century, Lee Jin Sang(李震相) and Kwak Jong Seok(郭鐘錫) overtured the theory that the mind(心) is just Li(理). The theory criticized an old theory that the mind includes Li and Ki(氣) or the theory that the mind is just Ki. The theory is unique on the basic understanding that the mind is ruling Li and put an emphasis on the reality of the mind. The theory is for the quest of an answer in the Ki-centered theory(主氣說) which dominated the period. In the later half of 186, the right side region of Kyungsang province accommodated many other theories from another regions. First of all, Huh Jeon who is from Pocheon Kyunggi province promoted the scholarship trend of right side of Kyungsang province and the studies of etiquette. In addition to that the Li-centered theory(主理說) which was suggested by Ki Jeong Jin from Jeol la province was actively accepted. The scholars from right side region of Kyungsang province also accepted Lee Hang Lo's Li centered theory. Thereby the scholars who lived in the right side of Kyungsang province united themselves setting them free from Confucian party oriented mind or scholarship genealogy. The scholars who live in the right side of Kyungsang province held many seminars. And they also held Hyangeumjurye(鄕飮酒禮 : banquet for identifying young and old). In Sancheong. 1877, seminar and banquet were the example in case. By taking this opportunity, the scholarship trend of promoting Nam Myeong(南冥 : representative Confucian scholar) vividly revived. Also by taking the chance, the scholars who lived in the right side of Kyungsang province newly established their theory and set to put their best effort to promote and research the meaning of Nam Myeong' philosophy. In te following year, they held seminar at Seon Seok temple(禪石寺) in Seong Ju. The meeting also has an important meaning to unite the scholars who live at the right side of Kyungsang province. The seminar and scholar's activity at the right side region of Kyungsang province in the 19th century has greatly contributed to the confucian independent movement by uniting representative of confucian scholars all through the nation in 19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