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양하씨 滄洲 河憕家門은 진주의 전형적인 토반 사족가문으로서 17세기 초 반까지는 남명학파의 핵심으로 활동했고, 그 후 양송을 통해 畿湖學을 수용하면 서부터는 강우 서인[노론]세력으로 구심점으로 기능해 왔으며, 그런 흐름은 한 말까지 지속되었다. 북인 남명학파에서 서인 기호학파로의 전향은 인조반정 이 후 江右 지역을 덮친 정치사회적 격랑을 헤쳐나가는 과정에서 모색된 것이었다. 따라서 17세기 중엽 이후 滄洲家의 사회적 활동은 남인과 서인의 대립이라는 정치적 판도 위에서 설정될 수 밖에 없었고, 이에 따른 제약도 작지 않았지만 이들은 현조 滄洲 河憕(1563-1624)에 대한 각종 추양사업을 추진하며 문호의 기반을 확충함은 물론 지역 노론세력 및 중앙의 노론계 관료들과 연대하여 강 우지역 노론계 공론을 결집시키는 데에도 부심하였다. 하증의 6세손 河鎭兌에 대한 孝子旌閭運動이 강우 지역 노론계의 대대적인 지원 속에 추진되고, 또 갖 은 난관에도 불구하고 무려 100에 걸쳐 공론이 유지되어 마침내 정려를 하사받 을 수 있었던 것도 강우지역 노론사회에서 지니는 창주가의 위상에서 기인하는 면이 컸다. 사환권에서 철저히 벗어나 있었던 창주가가 재지사족으로서의 기반을 확고하 게 유지할 수 있었던 또 다른 배경은 풍부한 경제력에 있었다. 18세기 초반에 기준할 때, 창주가는 1,000斗落에 육박하는 전답과 100구에 달하는 노비를 소 유하고 있었음이 분재기를 통해 확인되고 있으며, 시기가 지날수록 경제 규모 는 확대되어 가는 추세에 있었다. 이러한 경제력은 단순히 문호의 유지 차원을 넘어 창주가의 인사들이 학문에 힘쓰며 지역의 사론을 주도해나가가는 바탕이 되었다고 생각된다. 이 글은 시론적 수준을 넘지 못하고 있지만 강우지역 사족가문의 존재양태를 고문서를 통해 규명하려 했다는 점에서 전혀 무의미한 작업은 아닐 것이며, 남 명학파 연구로 대표되는 사상사적 분석의 사각지대를 보완할 수 있다는 점에서 도 일정한 의의가 있을 것으로 본다.
경남 산청군 신등면 법물은 상산 김씨 가문의 세거지이다. 상산 김씨 가문은 이곳에 세거하면서 향촌 사족으로 성장하였으며, 관료들과 학자들을 다수 배출 하였다. 19세기 박치복, 허전, 이진상의 문하에서 성리학과 예학을 섭렵한 학자 인 김진호도 그 중 한사람이다. 그는 법물의 이택당을 중심으로 강우지역 학자 들과 폭넓은 교유관계를 맺었으며, 물천서당 등 교육기관을 설립하여 후학 양 성에도 힘썼다. 19세기 김진호가 학문 활동을 하던 시기의 고문서 1,709건이 김진호의 후손 댁에 소장되어 있다. 1,709건의 고문서는 간찰․만사․시문․제문․혼서․잡저․기문․서 문․발문․단자․상량문․행적기․고유문 등이다. 이들 1,709건의 고문서 가운데 약 64.2%에 달하는 1,097건이 간찰이다. 1,097건 간찰은 상당 부분 김진호에게 발신된 것이며, 또 성재집의 간행처로 사용되던 은낙재나 강학의 장소인 이 택당에 기거하던 학자들에게 발신된 간찰들도 있다. 그러므로 서로의 안부나 개인적인 용무를 위한 간찰도 있으나, 강우지역 학자들의 학문 활동과 관련된 간찰이 많다. 간찰은 문집에 실리기는 하지만 문집 편집자의 편찬 방향에 따라서 선별되고, 선별된 친필 간찰의 전문을 싣는 경우는 흔치 않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강우 지역 학자들의 학문 활동을 볼 수 있는 친필 간찰은 사료적 가치가 크다. 그러 므로 간찰을 바탕으로 김진호를 중심한 강우 학자들의 교유관계, 학문 활동의 양상, 사회 현실의 인식과 대처에 대하여 정리하였다. 김진호는 혼맥에 의한 교유와 학문 활동에 의한 교유 관계를 유지하였다. 특 히 박치복, 허전, 이진상의 문인이었던 그는 강우 지역 학자들과 폭 넓은 교제 를 가졌는데, 허유․곽종석 등과 친분이 두터웠다. 상산 김씨 가문은 남인적 성향 을 가졌으나, 혼맥이나 학문 교유 관계에서는 노론과의 교유도 보인다. 학문 활 동은 각종 문집 간행과 강회를 통한 토론 등으로 대별된다. 김진호는 특히 허전 의 저서를 간행․중간하는데 관심을 많이 기울였는데, 그것은 특히 예론에 관심 을 갖고 실천하고자 한 김진호의 성향을 드러내 주는 것이기도 하다. 강우 지역 학자들은 19세기 조선의 현실을 직시하였으나, 강우지역의 공론이 형성되지 않 아 현실 참여에는 적극적이지 못한 측면이 있다. 서구 사상에 대해서는 성리학 을 통해서 전통을 고수하고자 하는 경향과 적극적으로 서학을 탐구하고자 하는 경향 등 학자들의 다양한 노력을 엿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