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s research aims to understand the specific aspects of the utilization of the pavilion by a group of governors in the mobile office system of the early Joseon Dynasty through two diaries written in the 16th century. Miam Diary by Yu Hee-chun, a governor of Jeolla Province, and Jaeyeongnam Diary by Hwang Sa-woo, a chief aide of Gyeongsang Province, are important historical materials that reveal the utilization patterns of the pavilion by the governor, who was the decision maker and main user of governmental pavilions. As a result of analyzing the two diaries, the utilization of governmental pavilions was concentrated in the hot summer season, May to July, which is closely related to the perception of temperature and humidity. While pavilions are mostly used as office and banquet places, some notable usage patterns have been identified. When there were several governmental pavilions in a town, the order of appreciation was determined by considering the location and scenery, and the pavilions were also used as a place to encourage learning as governors taught Confucian scholars well. Governmental pavilions functioned as a device to visualize hierarchy through seating and accommodation arrangements. The authors of the diaries left comments on the famous pavilions and sometimes went to see the pavilions after asking for permission from the superior. This research is meaningful in that it reconstructed the relationship network and phases of the times of governmental pavilions scattered across the country through institutions and daily life.
이글은 제1차 진주성전투에 있어서 경상우도관찰사 김성일의 역할을 구명하기 위한 논고이다. 주지하다시피, 진주성전투는 진주목사 김시민 등이 혈투를 전개하여 진주성을 지켰던 승첩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때 김성일은 경상우도관찰사로사 김시민 등을 지휘하여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초유사로 활동하던 김성일은 경상좌도 관찰사에 임명되어 초유사직에 물러나 잠시 경상우도를 떠났다가 다시 경상우도관찰사로 부임하였다. 그 사이에 개령, 성주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이 거창 방면을 위협하고 있는 가운데, 부산 창원 방면으로부터 일본군이 진주성을 공격해 왔다.
경상우도 관찰사로 부임한 김성일은 최고의 지휘관으로서 탁월한 역량과 전술운용으로 진주성을 지키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김성일은 진주목사 김시민 등을 주축으로 관군 중심의 수성체계를 구축하고, 진주성 외곽에 관군과 의병을 배치하여 구원하게 함으로써 진주성을 공격하도록하는 전략을 운영하여 진주성 방어력을 강화함은 물론, 분산전을 유도하여 일본군의 진주성 공격의 전력을 약화시켜 진주 수성군의 부담을 덜어 주었다. 아울러 포위된 진주성에 화살 등의 물자를 공급하여 줌으로써 전투력을 유지하고 군사의 사기를 높여주었다.
진주성 전투 직후 그는 거창 방면으로 쳐들어 오는 일본군에 대응하기 위하여 삼가로 달려가, 주변 지역의 관군을 거느리고 의병장 김면, 정인홍 등을 도와 이를 막아내었다. 이후 의병장 김면, 정인홍 등은 전라도 의병장인 최경회 임계영 등이 성주, 개령 지역의 일본군을 지속적으로 공격하여, 마침내대 다음해 2월 성주, 개령지역을 수복하였는데, 여기에도 관찰사로서 김성일의 역할이 크게 작용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결론적으로 진주성전투의 승리는 경상우도의 최고 지휘관이었던 김성일의 전략과 진주성의 수성장이었던 김시민의 절묘한 전술운용, 그리고 각 전투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전투를 수행했던 제장과 사졸의 분전이 어우러진 값진 결과였다. 진주성 전투에서의 승리는 진주성을 지킴으로써 수만의 성내 관민의 목숨을 구한 것은 물론이고, 경상우도가 일본군의 수중에 들어가지 않게 하였으며, 나아가 일본군이 호남으로 진출할 수 있는 길목을 차단하는 성과를 거두었다.